몸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몸, 인간을 다시 읽다. 10

by호시우행

신발을 신으려고 발을 집어넣는다. 뒤꿈치를 맞추고 끈을 묶는다. 발과 바닥 사이에 밑창이 하나 생긴다. 맨발로 바닥에 서 있을 때 발바닥으로 직접 느꼈던 차가움과 거칠기가 한 겹 걸러지고, 작은 요철을 만나는 감각도 달라진다. 같은 길을 걸어도 밑창의 두께와 재질에 따라 발을 디디는 느낌이 달라지고, 발목을 감싸는 신발을 신으면 발을 움직이는 방식도 조금 달라진다. 그런데 몇 걸음을 옮기고 나면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신발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발을 감싸고 바닥에 닿아 있는데도 걷는 동안에는 하나의 물건으로 따로 의식되지 않는다.


신발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으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조금 전까지 발과 함께 움직이던 신발은 그 자리에 남고 나는 그것을 두고 걸어간다. 발과 신발은 분명히 다른 존재다. 발은 몸이고 신발은 물건이다. 신발을 몸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다. 그런데 신발을 신고 걷는 동안 내가 하는 일은 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발의 밑창이 바닥과 만나는 방식이 발에 영향을 주고, 발은 그 조건에 맞추어 움직인다. 몸과 사물은 서로 다른 채로 하나의 행동 안에 들어온다.


안경을 쓰면 그 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안경은 눈이 아니고 얼굴도 아니다. 벗어서 바카라상 위에 놓으면 하나의 물건이다. 하지만 쓰고 있는 동안에는 안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렌즈 너머의 글자를 읽고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길을 찾는다. 안경을 오래 쓰면 얼굴에 걸쳐 있다는 감각도 흐려진다. 안경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행위 속에서 의식되지 않는 것이다. 몸과 사물의 구분은 남아 있지만, 행동 속에서는 둘이 서로 떨어져 작동하지 않는다.


의자에 앉는 일도 다르지 않다. 몸의 무게가 좌석에 실리고 등받이의 각도에 따라 허리의 자세가 달라진다. 좌석의 높이가 달라지면 다리를 놓는 위치도 달라진다. 몸이 의자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앉아 있는 몸의 상태는 의자의 조건과 함께 만들어진다. 같은 사람이 같은 몸으로 앉아 있어도 의자가 달라지면 자세와 감각이 달라진다.


옷도 몸과 세계 사이에 놓인 사물이다. 소매의 길이는 팔의 움직임을 바꾸고, 허리를 조이는 옷은 앉고 일어나는 동작에 영향을 준다. 두꺼운 옷을 입으면 몸과 공기의 관계도 달라진다. 옷은 피부 바깥에 있지만 몸의 움직임과 감각에 들어온다. 몸은 피부 안에 있고 옷은 피부 밖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이 경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질문이 생긴다. 몸의 경계가 피부라면, 왜 피부 바깥의 사물들이 몸의 행동에 이렇게 깊이 관여하는가.이 질문은 몸과 사물을 같은 것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발은 발이 아니고 안경은 눈이 아니며 의자는 몸이 아니다. 몸과 사물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구별한다는 것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몸의 경계는 분명하다. 그러나 몸이 살아가는 방식은 그 경계 안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걸음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발이 바닥을 딛을 때 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바닥의 높낮이와 질감이 발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고, 신발의 밑창은 그 만남을 다시 바꾼다. 내가 걷는다는 하나의 행동에는 발과 신발과 바닥이 서로 다른 존재로 들어와 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셋의 관계가 없으면 그 걸음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망치를 예로 든 것도 사물을 눈앞에 놓인 단순한 물체로만 이해하는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망치를 사용할 때 우리는 망치의 모양이나 재질을 계속 관찰하지 않는다. 못을 박는 작업 속에서 망치는 손의 행동과 연결되고, 못과 나무와 함께 하나의 작업 관계를 이룬다. 망치는 손이 아니다. 하지만 망치를 사용하는 손의 행동을 망치와 무관하게 설명할 수도 없다. 사물은 인간의 행동 바깥에 따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방식에 관계한다.


메를로퐁티는 이 문제를 몸 자체의 차원에서 더 밀어붙인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몸은 의식이 명령을 내리면 움직이는 도구로 설명되지 않는다. 몸은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에 반응하면서 움직인다. 우리는 손가락의 각도를 하나씩 계산한 뒤 물건을 잡지 않는다. 몸은 물건의 크기와 거리와 위치를 지각하면서 손을 뻗고, 손끝에 닿는 감각에 따라 움직임을 조절한다. 세계는 몸 앞에 놓인 대상이고 몸은 그것을 처리하는 주체라는 단순한 구도가 실제 경험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몸은 세계 안에서 움직이며 세계와 함께 자신의 행동을 만들어간다.


신발을 신고 걷는 일도 그 관계 안에 있다. 신발을 신었다고 해서 발이 신발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발은 신발을 포함한 조건에서 바닥을 만나고, 그 만남에 맞추어 움직인다. 몸이 사물을 사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의 조건이 몸의 움직임을 바꾼다. 몸과 세계의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몸의 경험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생물학적인 몸의 경계를 묻는다면 답은 비교적 분명하다. 피부가 몸과 바깥을 구분한다. 피부 안에는 신경과 근육과 뼈와 장기가 있고, 피부 바깥에는 다른 사물과 공간이 있다. 신발을 벗어놓을 수 있고, 안경을 벗을 수 있고, 의자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그 경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몸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묻는다면 답은 달라진다.


몸은 피부 안에서 세계와 관계한다. 발은 바닥을 딛고, 눈은 빛을 받아들이고, 손은 사물을 만지며, 귀는 소리를 듣는다. 몸의 경계는 세계와의 접촉을 막는 벽이 아니라 접촉이 일어나는 조건이다. 피부가 있기 때문에 몸과 세계는 서로 다른 것으로 남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몸은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몸의 경계를 넓힌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신발이 발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안경이 눈의 일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자전거가 몸의 일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몸이 사물과 관계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진다. 몸의 물질적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의 행위 가능성이 관계 속에서 달라지는 것이다.


자전거를 생각하면 그 차이가 잘 드러난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는 몸과 자전거가 따로 느껴진다. 핸들을 어느 쪽으로 돌릴지, 몸을 얼마나 기울일지, 페달에 어느 정도 힘을 줄지를 의식한다. 익숙해지면 이런 계산이 줄어든다. 몸을 기울이면 자전거가 방향을 바꾸고, 손의 작은 움직임이 바퀴의 방향을 바꾼다. 자전거가 몸이 된 것은 아니다. 몸이 자전거와의 관계를 익힌 것이다.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도 같은 의미다. 연필을 쥐고 글씨를 쓸 때 손가락과 연필을 따로 의식하지 않는다. 망치를 쥐고 못을 박을 때도 손과 망치의 움직임을 하나씩 계산하지 않는다. 도구가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도구를 포함한 행동의 방식을 익혔기 때문이다. 몸은 사물을 자기 안으로 흡수하지 않고도 사물과 함께 행동할 수 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몸과 세계의 경계를 없애는 것과 몸이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켄 윌버의 『무경계』를 읽을 때도 이 구별이 필요하다. 윌버가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피부 안과 밖을 나누는 생물학적 경계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을 어디까지라고 규정하는지, 그리고 그 규정에 따라 무엇을 ‘나’라고 받아들이고 무엇을 ‘나 아닌 것’으로 밀어내는지를 문제 삼는다. 그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정된 자아의 경계를 실재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방식을 살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윌버의 『무경계』를 신발이나 안경의 사례에 그대로 대입해서 “신발도 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윌버의 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질문은 한 단계 뒤에서 작동한다. 나는 왜 이 몸을 ‘나’라고 부르는가. 피부는 몸의 물질적인 경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나’라는 경험의 경계가 반드시 피부와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몸에 대한 감각도 있고, 마음에 대한 감각도 있으며, 타인과 세계를 구분하는 방식도 들어 있다. 내가 무엇을 나라고 받아들이고 무엇을 나 아닌 것으로 밀어내는지는 단순히 피부의 위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아의 경계를 무한히 넓히자는 뜻도 아니다. 나와 타인은 다르고, 몸과 세계도 다르다. 나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하고, 나의 몸과 다른 몸의 경계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경계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오히려 바카라임과 관계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경계가 있기 때문에 관계가 가능하다. 신발과 발은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함께 걸음을 만든다. 안경과 눈도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함께 본다. 의자와 몸도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함께 앉는 자세를 만든다. 서로 다른 존재가 하나의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경계를 없앨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경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경계는 단절선이면서 동시에 접촉면이다. 몸을 세계와 구분하면서도 세계와 만나게 하는 자리다.


신발을 벗어 바닥에 놓는다. 조금 전까지 발을 감싸고 있던 신발은 이제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나는 신발 없이 몇 걸음을 걷는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감각이 달라진다. 다시 신발을 신는다. 같은 발인데 바닥이 다르게 느껴진다.


발이 바뀐 것은 아니다. 발이 세계를 만나는 조건이 바뀐 것이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 몸을 단순히 피부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보인다. 몸의 경계는 분명하지만 몸의 행동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몸은 세계와 섞여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접촉하면서 움직인다.


그래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몸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몸의 물질적인 경계는 피부에서 끝난다. 그러나 몸이 살아가는 경험은 피부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을 함께 붙잡을 때 몸을 조금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피부는 몸을 세계와 구분하지만 세계로부터 고립시키지 않는다. 몸은 자기 경계를 가진 채 바닥을 딛고, 사물을 사용하고, 공간을 지나며, 다른 존재와 관계한다.


몸의 가능성도 그렇게 생긴다. 몸 안에 이미 모든 가능성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세계가 만나는 방식에 따라 어떤 가능성은 열리고 어떤 가능성은 닫힌다. 같은 발도 맨발과 신발을 신고 걸을 때 다른 감각을 갖고, 같은 손도 연필과 망치를 잡을 때 다른 일을 한다. 몸은 변하지 않았는데 몸이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몸을 이해한다는 것은 피부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만은 아니다. 그 몸이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사용하고, 어디에서 움직이고, 어떤 세계와 관계하는지를 함께 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나’라는 말도 다시 질문하게 된다. 몸은 피부에서 끝난다. rm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끝나는가. 아마 이 질문에는 몸의 경계만으로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몸에는 경계가 있다. 그러나 몸은 그 경계 안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몸은 경계를 가진 채 세계를 만난다. 그 만남 속에서 움직이고, 감각하고, 행동하며,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간다. 몸의 끝을 찾는 일은 경계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경계를 가진 몸이 어떻게 세계와 관계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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