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어떻게 세계를 아는가

몸, 인간을 다시 읽다. 13

by호시우행

맨발로 마당을 걸으면 흙의 상태가 발바닥에 먼저 전해진다. 햇볕에 말라 단단해진 곳과 물을 머금어 발가락 사이로 조금씩 밀려나는 곳은 눈으로 보면 모두 흙이지만 발바닥에 닿는 느낌은 다르다. 차가운지 따뜻한지, 단단한지 물렁한지, 미끄러운지 거친지, 발을 디뎌도 괜찮은지를 하나씩 생각하지 않아도 걸음이 달라진다. 발을 내딛는 힘이 달라지고 발가락에 들어가는 힘도 달라진다. 흙의 상태를 머릿속에서 분석한 뒤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동안 몸이 그 상태를 알아간다. 세계에 대한 어떤 앎이 생각보다 먼저 몸에서 시작되는 순간이다.


뜨거운 국그릇을 옮길 때도 비슷하다. 손끝에 전해지는 열이 강하면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이 달라지고 그릇을 잡는 위치도 달라진다. 같은 그릇이라도 손바닥이 마른 날과 땀이 밴 날의 감각이 다르고, 손에 힘이 남아 있을 때와 피곤할 때 필요한 힘도 달라진다. 눈은 같은 그릇을 보고 있지만 손은 무게와 온도와 표면의 상태를 한꺼번에 만난다. 그릇 하나를 옮기는 짧은 동작 안에서 몸은 그것이 무엇인지뿐 아니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알아간다.


우리는 세계를 이미 완성된 대상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저기에 나무가 있고 저기에 길이 있고 저기에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뒤 머릿속에서 정보를 처리하면 세계를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바깥에 있고 몸은 바깥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장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길을 걸을 때 우리는 길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비가 내리면 신발 밑창의 감각이 달라지고 걸음의 폭이 달라진다. 바람이 세게 불면 몸을 세우는 방식이 달라지고 어두운 길에서는 발밑의 높낮이에 더 신경을 쓴다. 좁은 문을 지나갈 때는 어깨가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몸이 가늠하고, 의자에 앉을 때도 눈으로 높이를 계산하기보다 몸이 내려갈 자리를 찾는다.


길은 단순히 길이가 있고 폭이 있는 공간이 아니다. 몸이 그 길을 어떻게 지나갈 수 있는가에 따라 길의 의미가 달라진다. 높은 계단은 다리가 가벼운 사람에게는 오르내리는 시설이지만 무릎이 아픈 사람에게는 힘을 요구하는 장소가 된다. 같은 의자도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는 앉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고 어린아이에게는 올라가야 하는 높이가 된다. 혼자 걸을 때 충분했던 길도 짐을 들면 좁아지고, 움직임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문턱 하나가 지나갈 수 있는 곳과 지나갈 수 없는 곳을 가르는 선이 된다. 길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길과 몸이 만나는 관계가 달라진 것이다.


이것은 몸의 크기나 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물을 마실 때 우리는 먼저 물의 성분을 분석하지 않는다. 입술에 닿는 온도와 혀에 퍼지는 감각을 느끼고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 속에서 물을 마신다. 비가 내리면 강수량을 계산하기 전에 피부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젖어가는 옷으로 비를 경험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음파의 진동수를 계산하지 않는다. 말의 높낮이와 떨림, 말 사이의 멈춤을 들으며 상대의 상태를 짐작한다. 알기 전에 느끼고, 느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는 가운데 더 알게 된다.


이런 앎은 바카라에서 배운 지식과는 다른 자리에 있다. 뜨거운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뜨거운 그릇에서 손을 떼는 것은 같은 앎이 아니다. 자전거의 균형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 어디까지 중심을 옮겨야 하는지를 그대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래 농사를 지은 사람이 흙을 손으로 만지고 밭의 상태를 짐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숫자로 말하지 않아도 흙이 물을 얼마나 머금고 있는지, 씨앗을 뿌리기에 괜찮은지를 몸으로 가늠할 수 있다.


몸에는 말로 다 옮기기 어려운 앎이 있다. 익숙한 일을 할 때 우리는 해야 할 동작을 하나씩 떠올리지 않는다. 손이 움직이고 발이 자리를 찾고 몸의 균형이 맞춰지는 동안 필요한 것이 조절된다. 아이가 넘어지려 할 때 손을 뻗는 것도 거리와 속도를 계산한 뒤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몸이 상대의 움직임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움직인다.


그래서 몸의 상태가 달라지면 같은 세계도 다르게 다가온다. 감기에 걸려 코가 막히면 음식의 맛이 달라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날에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쓰인다. 발목을 다치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계단의 높이가 커진다.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손잡이 하나가 몸이 불편한 날에는 중요한 시설이 된다. 세상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바뀐 것은 아닌데 내가 그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지면서 익숙했던 것들의 의미가 달라진다.


몸에 움직임의 어려움이 있을 때 이 사실은 더 선명해진다. 머릿속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가 분명한데 실제 움직임은 그 생각과 정확히 겹치지 않을 때가 있다. 손을 뻗어 물건을 잡으려면 손의 위치와 속도를 맞추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고, 말하려는 문장이 머릿속에 분명해도 입에서는 생각한 속도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문턱의 높이와 의자의 위치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와 대화를 주고받는 시간까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한 계단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루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경계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대화의 속도가 다른 사람에게는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꺼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빼앗는 속도가 된다. 이 차이를 개인의 능력 차이로만 설명하면 놓치는 것이 있다. 우리가 평범하다고 부르는 환경이 사실은 특정한 몸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은 같은 문인데 모든 몸에게 같은 방식으로 열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몸이 세계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과 기억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는 정도에 따라 움직임도 달라진다. 처음 걷는 길에서는 발을 어디에 놓을지 신경 쓰지만 오래 다닌 길에서는 방향을 하나씩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모퉁이에서 길이 꺾이는지, 어디에서 바닥이 고르지 않은지, 어느 곳에서 발을 조금 높여야 하는지를 몸이 알고 있다. 몸은 세계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장치라기보다 세계와 함께 움직이면서 자신이 살아갈 자리를 익혀간다.


그래서 몸의 앎에는 세계가 어떤 모습인가만 들어 있지 않다.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함께 들어 있다. 문턱을 넘을 수 있는지, 그릇을 들 수 있는지, 계단을 오를 수 있는지, 누군가의 말을 듣고 대답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몸의 경험 속에 쌓인다. 몸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난다.


몸을 세계와 나 사이에 놓인 도구라고 생각하면 나와 세계 사이에는 몸이라는 경계가 생긴다. 내가 있고 세계가 있고 그 사이에 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맨발로 흙을 밟을 때 발바닥과 흙은 서로 떨어진 두 대상처럼 경험되지 않는다. 흙의 단단함이 발에 전해지고 발의 힘이 흙에 닿으며 다음 걸음이 달라진다. 컵을 잡을 때도 손과 컵을 완전히 따로 경험하지 않는다. 손은 컵의 무게에 맞춰 힘을 바꾸고 컵은 손의 움직임을 바꾼다.


바람을 맞는 얼굴도 그렇다. 바람을 분석하는 내가 따로 있고 바람을 받아들이는 얼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을 맞는 몸으로 그 순간을 살아간다. 몸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라기보다 세계가 나에게 닿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몸을 안다는 것은 몸의 구조와 이름을 많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무엇에 반응하고 어디에서 멈추며 어떤 곳에서는 편안하고 어떤 곳에서는 불편한지를 알아가는 일도 몸을 아는 일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내 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세계에서 내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가는 일도 그렇다.

우리는 몸으로 세계를 살아가면서 세계를 알아간다.


그렇다면 몸은 세계를 아는 도구일까. 아니면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계를 아는 방식일까.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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