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이지만 필요하니까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일요일, 동물농장을 보고 나는 고양이에 빠져버렸다. 요물이라 해서 조금은 무서웠고 불길한 짐승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너무나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엄마를 조르고 아빠를 졸랐다. 몇 주를 막무가내로 떼를 쓴 끝에 모란시장까지 가서 만원을 주고 아주 조그마한 치즈 고양이를 데려왔다. 이름은 마루로 지었다. 느긋하고 무던하며 만두 속과 짜장면 양념을 좋아하던 아이였다.
이후 이런저런 핑계로 고양이가 늘어났다. 냥줍해온 소심한 까만 턱시도를 입은 루비, 어딘가에서 버려져 우리 집으로 흘러들어온 하얗고 긴 털의 앙칼지던 비누. 슈, 호야, 콩이.
고양이 반려 지식이 많지 않던 시절 중성화가 늦어 마루와 비누가 거사를 치르고 새끼를 네 마리 낳기도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 이름 지었는데, 세 마리는 분양을 가고 가을이가 남았다. 아빠를 닮아 느긋한데 딸이라 애교가 많았다.
결혼하며 고양이와 잠시 떨어졌지만 이내 친정의 고양이들을 데려오고 말았다. 언니가 냥줍 한 크림이, 엄마가 냥줍 한 치즈. 몇 년 지나 또 엄마 집 근처에서 홀로 지내던 어린 고양이 호두도 합류했다.
치즈는 4년 전에, 크림이는 작년 초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전적으로 내 바카라임 하에 돌봤던 고양이라 더 각별한데, 이제는 호두만 남았다. 첫 고양이 마루의 자손이었던 가을이는 엄마 곁에 머물다 역시 작년에 멀리 떠났다.
나는 호두가 외로워하는 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 일곱 살 아비시니안 유기묘 한 마리를 더 입양해 기어코 두 마리를 곁에 두었다.
프란츠 카프카라고 이름 붙였는데 데려오자마자 보호소 스트레스에 자가면역성 질환을 앓게 되어 병원비를 이백만 원 쓰게 됐지만 개의치 않았다. 병치레를 끝낸 프란츠 카프카는 이름답지 않게 식탐 그득한 건장한 고양이가 되었다. 그리고 호두와는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약간 서먹한 사이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에 ‘맥’이라는 요크셔테리어 강아지를 길렀다. 할아버지에게 예쁨 받고 싶어 발가락을 챡챡 긁어대던 아이였지만 할아버지는 언제나 맥을 차버리기 일쑤였다. 사랑을 갈구하는, 보통의 평범한 강아지였다.
강아지냐 고양이냐,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고양이 파다. 고양이가 강아지보다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나와의 궁합은 고양이가 더 맞는 것 같다는 의미다.
고양이는 갈구하지 않는다. 그저 풍경으로서 거기에 있다. 손길을 원할 땐 다가와 골골대며 비비대지만, 만족하면 이내 멀어져 자신만의 공간에 오도카니 자리를 잡는다. 갸웃하며 지그시 나와 눈을 마주치면,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다가가 그 털에 코를 묻고 와랄라 한껏 냄새를 맡고는 하지만 나도 이내 소파로 돌아가 자리를 잡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지킨다고 볼 수 있다. 나도, 고양이들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강아지는 사랑을 갈구하고, 원하며, 뿜어낸다. 그 정직하고 올곧은 애정표현에 인간은 항복하고 만다. 그런 강렬한 그들의 에너지가 문득 그립다. 고양이도 좋지만, 강아지도 좋다. 커다란 아이를 가득 안고 나를 바라보며 세차게 꼬리 흔드는 모습도 보고 싶다.
하지만 고양이에 익숙해진 지금에 와서는, 강아지를 반려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저것 걱정거리가 많아진다. 일단 집에 모시는 고양이들께서 심기가 매우 불편하실 것이다.
그래서 은퇴 후에 어딘가에서 사심을 채울 수 없을까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펫 시터를 해보려고 했는데, 합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려동물관리사 자격증까지 땄지만, 여전히 낙방이었다. 알고 보니 고양이 시터는 넘치고 강아지 시터가 부족한데, 나는 강아지와 관련한 이력이 없기 때문인 듯했다.
조금 오기가 생겨서, 그렇다면 강아지와 관련된 경험을 쌓아야겠군 결심했다. 당근에서 돌봄 지원도 해보고, 유기견 산바카라 자원봉사도 해봤다.
그러다 얼마 전 경기도 외곽 애견카페의 평일 오전 아르바이트에 합격했다. 일주일에 이틀, 두 시간씩 근무한다. 아이들 밥을 챙겨주고, 배변을 치우고, 카페를 정리하는 일. 손님은 응대하지 않고, 오로지 강아지만 응대하면 되는, 아주 제격인 일이다.
시간 넉넉한 백수인 덕에 이런 귀한 자리도 얻게 되어 나는 다시금 은퇴한 사실에 감사한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일주일 네 시간, 한 달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다. 거리도 가깝지 않아서 차량으로 왕복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아르바이트 요일이 고정되어 이제는 자유롭게 다니는 것도 조금은 제약이 걸렸다.
어쩌면 생활은 좀 더 불편해지고 제한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이 기대되는 건, 순전히 사랑스러운 강아지들을 돌보게 된다는 순수한 사심 때문이다. 첫 출근 날부터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쫄딱 젖어 퇴근했지만 나는 기뻤다.
그들이 왜 이다지도 좋을까. 사랑스럽고, 귀엽고, 털북숭이라서?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과는 이해타산을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반려동물로서 고양이나 강아지는, 전적으로 사랑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돈을 벌기 위해 동물을 반려하진 않는다. 우리는 오직 사랑을 주고, 그리고 사랑을 받는 만족을 위해 그들을 기꺼이 반려하고자 한다.
밀고 당기고 얽히고설키는 지긋지긋한 인간관계와는 다르다. 물론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과 다르게 행동할 때면 답답하기도 하다. 나 아프다, 한 마디 정도는 해줬으면 좋겠는 때도 많다.
하지만 반려동물이 말을 안 듣고 밥을 잘 안 먹어도, 거기에는 다른 숨은 의도 같은 건 없다. 그들과는 고도의 감정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면 된다.
어쩌면 이건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잔인한 문화일지도 모른다. 말 못 하는 아이들을 나 좋자고 데려다가 죽을 때까지 옆에 둔다니.
좋은 걸 먹이고 아픈 걸 치료해 주고 사랑해 주고 사랑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동의 없이 데려온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스톡홀름 증후군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등 따습고 배불러 보이니까 그들이 행복할까, 단언하는 것도 어렵다. 정말 그럴까, 너에게 더 좋은 삶이 있었던 것 아닐까. 나는 알 수가 없다.
혼자 남은 호두가 외로워 보인다며 프란츠 카프카를 데려온 것도, 강아지가 그리워 입양을 고민하는 것도 결국은 다 내 이기심이다. 내가 원해서 그들의 동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동의 없이 생명체를 데려와 나의 위안을 얻는다. 너도 만족할까 생각하노라면 죄바카라감이 들어, 더 잘해주려 애쓴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결국에는 내가 위안받기 위함이다.
때론 스스로의 그런 이기가 역겹지만, 그래도 결국 그렇게 한다. 이제는 나의 풍경에 고양이가 없는 것은 너무 쓸쓸해 못 견디겠어서.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어떤 인간이 자신을 선택하든, 간식을 주든 말든, 사랑을 주든 말든. 심지어는 반려인간이 자신을 괴롭히거나 길거리에 버려도, 고통스러울지언정 받아들인다.
그저 폭력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물론 그들도 고통스럽거나 슬퍼하거나 우울할 수 있는 생명체고, 그래서 이상 증세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메커니즘에 인간과 같은 자기 합리화, 자기 연민, 자기혐오는 없다. 그냥 받아들이고 반응할 뿐이다.
지능이 낮으니까 당연한 거야,라고 폄하할 수 있는가? 오히려 더 효율적인 것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과 후회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니까. 자신을 갉아먹기만 할 뿐인 생각들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생명체가 살아가는 효율 측면에서 본다면 생각에 갇혀서 꼼짝하지 못하고 얼어버리고 마는 인간이 오히려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고, 본능에 충실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한다.
나는 어떤 일이 닥쳐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고통을 꿀꺽 삼킨 후 다시 나아가는 단단한 철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생명체야말로 그것에 가장 가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고, 여전히 번뇌하며 생각에 고통받는다. 철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현실과 타협하며 돈으로 은퇴를 사서 도망쳤다.
쓸모없는 생각의 파도에 휩쓸려가다 문득 창틀 해먹에 누워 햇볕을 쐬는 프란츠 카프카를 바라보노라면, 그 순간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떠올리며 거센 파도를 잠시나마 잠재울 수 있다.
그리고 내 곁을 톡톡 두드려 호두를 부른다. 배 위의 말랑하고 따뜻한 생명체를 만지작대며 그 행복의 순간을 느낀다.
그렇게 나의 풍경에는 고양이가 있다.
홀로 있는 순간이 갑작스레 외로워지고 이곳에 나 혼자 오도카니 떨고 있는 것 같을 때, 나는 크림이의 호박색 눈을 떠올린다. 내 옆에 찰싹 달라붙은 치즈의 근육질로 뭉쳐진 단단한 등을 생각한다. 호두의 말랑한 뱃살의 감촉과 프란츠 카프카의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그려 본다.
그렇게 그들의 존재는 내게는 어쩌면 가족 이상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호두와 프란츠 카프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도 또 다른 생명체를 내 옆에 모셔오고 말 것이다. 어쩌면 어린 고양이와 강아지를 같이 입양해서 사이좋은 친구가 되기를 기대해 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도 될 때, 정착할 때가 되었다 생각되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일어나서, 밥 챙겨 주고, 나도 챙겨 먹고, 산바카라도 하고. 그러면 하루는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흘러가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필연적으로 나보다 먼저 떠나고는 한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치즈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회사에서 달려온 나를 기다려 주었다. 도착한 지 10분 만에 나와 마주친 눈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신부전으로 고생하던 크림이가 유독 기운 없던 날, 지독히도 출근하기 싫어 오전 반차를 썼다. 오전 수액을 놓아주고, 좋아하는 습식을 세 가지 준비해 크림이가 엎드린 코앞 바닥에 깔아 두었다. 내가 참석해야만 한다는 회의 때문에 못내 출근을 했고, 돌아오자 크림이는 어둑한 실내에서 나갈 때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도 그 자리에 무릎 꿇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첫 고양이 마루가 대학 동물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병문안 간 나를 보고 알은체 하던 것을 기억한다. 인공호흡까지 했으나 이제는 보내주라던 의사의 말에 엄마 언니와 울며 알겠다고 하던 그 순간도.
그건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매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내 삶의 엔진이 완전히 멈춰 설 때에는 나 홀로 남아 있어야 한다. 내 곁에 있던 아이들이 나 없이 남아 방황하고 떠돌지 않도록.
아마 몇 년은 쓸쓸할지 모르지만, 아이들을 보낼 때에는 또 슬픔이 가득 차겠지만, 그래도 참아내야지. 그래도 이제는 일 때문에 그들이 가는 순간을 지켜주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서 마침내 저 너머에 닿았을 때 그들 모두가 조심히 다가와 내 손끝에 가만히 그 그리운 얼굴을 비벼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