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도)
좋은 정신
지금까지 “핀란드엔 이렇게 좋은 문화가 있어!”라고 많이 얘기했지만, 분명 우리나라에도 좋은 문화나 좋은 정신이 있다.
바로 정.
멀리서 온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한다거나 하는 일이 당연시되는 걸 나도 여러 번 경험했다.
“네가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밥을 살게”같은 말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내 주변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도 흔하고, 한국을 찾은 외국인에게 밥값을 대신 계산하며 식사를 대접하기도 한다.
그런데 핀란드에서 난 외국인이었지만, 누가 나한테 난데없이 밥을 대접해 주거나 한 적 전혀 없었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우리에게만 있는 독특하고 좋은 정신이 바로 정이다.
한편, 핀란드에도 핀란드만의 좋은 정신이 있다.
시수(Sisu)라는 독특한 정신인데, 시련에 굴하지 않는 끈기이며, 동시에 삶의 역경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일상의 소소한 평온함에 감사하는 태도가 바로 시수다.
시수 현실판: -20도를 따뜻하다고 느끼기.
현실에서의 '정'은 멀리서 온 사람에게 밥을 사주는 거라면, 현실에서 '시수'는 안 좋은 상황을 유머로 승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는 핀란드에서 친구와 함께 핀란드 북쪽, 라플란드로 오로라투어를 간 적 있다.
비교적 따뜻한 핀란드 남부의 헬싱키와는 달리, 북쪽은 정말로 몹시 추웠다.
내가 라플란드에 있던 날은 특히나 더 추웠는데 그때 온도가 -30도였다.
-30도가 어떠냐 하면, 콧속에서 콧물이 얼고, 속눈썹에는 얼음이 하얗게 자라는 온도다.
맨 손을 밖에 꺼내면 손가락이 얼어버릴 것 같았고, 날이 너무 추워서 폰 배터리도 자꾸 꺼질 정도였으니 핸드폰 사용도 거의 불가능했다.
관광하러 일부러 이 멀리까지 찾아온 건데, 오로라도 안 뜨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눈밭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아침에 또 스키를 타러 밖에 나갔는데, 어쩐지 오늘은 날씨가 따뜻한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와 함께 “오늘은 좀 따뜻한 거 같은데?”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바깥 온도가 -20도였다.
고통스러울 땐 시수, 시수하세요!
다시 생각해도 뭔가 웃긴 이 상황은 실제로 우리가 느낀 그대로였다.
우리나라에서 -20도였다면,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어할 정도로 너무너무 추운 날씨인데, 우리는 -20도인데도 정말로 “오늘 좀 따뜻하다”고 느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시수 정신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한국인인 우리 입에서도 처지를 자조하는 블랙유머가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걸 보니 핀란드 사람들이 그토록 자주 Sarcasm(풍자)을 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괜찮아 ^^
우리나라에서 정이 흔한 것처럼, 핀란드에서도 시수 정신은 흔하게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핀란드 사람들은 정말 유머러스한 것 같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폭설이 오면 교통이 마비되고 '30년 만의 최악의 폭설'이라는 헤드라인으로 뉴스에 도배되는데, 핀란드에선 심각한 폭설도 그저 '평범한 수요일' 정도로만 여기면서 그저 유머러스하게 넘긴다.
폭설 같은 안 좋은 상황을 비관하는 게 아니라, 웃음으로 승화하는 그런 태도.
그런 태도가 녹아있는 정신이 바로 시수였다.
시수 정신을 본받아 현실 문제를 어떻게 유머로 승화할 수 있을까?
좋은 예시가 하나 있다.
한국인 친구들끼리 집들이 모임을 한 적 있다.
그 모임에서 한 친구가 실수로 물을 쏟았는데, 그 친구는 굉장히 미안해하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문득 "괜찮아. 별 일 아니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라는 상냥한 말 대신, "괜찮아 ^^ 어차피 네가 닦을 거잖아.”라는 풍자 섞인 말이 떠올랐다.
그 친구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또 미안해할 필요조차 없도록 배려하는 말을 해서, 실수도 웃음으로 승화하는 시수를 실천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