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봉이 김선달의 손님이 된 이유
식품영양학자가 동화를 읽는 방법 ㉔
제목 : 물을 돈 주고 산다고?
부제 : 기꺼이 봉이 김선달의 손님이 된 이유
어릴 때 봉이 김선달 이야기를 읽으면서 김선달 그가 참 뻔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동강 물이 자기 것도 아닌데 그걸 팔 생각을 하다니. 강물은 그냥 흐르는 것이고, 누구나 마실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물을 팔아서 돈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러니 대동강 물을 팔았다는 이야기는 내게 그저 기가 막힌 사기극이었다.
그런데 몇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봉이 김선달을 다시 만난 것은 뜻밖에도 대학의 식품가공학 수업에서였다.
1980년대 초반,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미국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오신 젊은 교수님께서 미래의 식문화를 이야기하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물도 병에 담아서 팔게 될 겁니다. 김치도 집에서 담그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만들어서 사 먹게 될 거고요.”
우리과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엥? 무슨 소리?” 설마 그럴 리가 있느냐는 듯 웃었다.
수돗가에 가면 물이 나왔고, 집에서는 보리차를 끓여 먹었다. 그 흔한 물을 돈 주고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친구들과 강의실을 나서면서 말했다.
“물을 판다고?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그때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을 집어들고 계산대에서 돈을 낸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수에도 브랜드가 있고, 가격이 있고, 취향이 있다. 어떤 물을 마실 것인지 고르기도 한다. 이젠 물을 바라보는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이미 물은 이미 우리 식탁에서 조금씩 모습을 바꾸고 있는 중이었다.
더 오래 거슬러올라가면 가마솥에 밥을 짓던 시절에는 누룽지에 물을 부어 끓인 숭늉이 있었다. 밥을 하고 남은 것이었으니 따로 음료를 준비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주방이 현대화되면서 숭늉은 보리차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여두면 온 가족이 함께 마셨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쯤이었을까. 델몬트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우리 집 냉장고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당시만 해도 오렌지주스는 매일 마시는 음료라기보다 손님이 오거나 특별한 날에 내놓는 제법 근사한 음료였다. 특히 델몬트 오렌지주스가 담긴 묵직한 유리병은 주스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주스를 다 마시고 난 뒤에도 어머니들은 그 병을 버리지 않고 깨끗하게 씻어 보리차를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오렌지주스 병은 어느새 각 가정의 물병이 되었다
냉장고 안에 투명한 유리병이 가지런히 들어 있는 모습이 좋았다. 그때 우리는 이미 ‘병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그것을 돈 주고 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병은 상품이었지만 물은 여전히 공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물에도 가격표가 붙었다. 생수가 등장했고 사람들은 생수를 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을 바라보는 슬롯의 불편한 시선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수돗물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사건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물을 둘러싼 슬롯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결국 오늘날 우리는 마트에서 생수를 사고, 회사 바카라상 위에 생수병을 올려놓고, 운동을 하면서 생수를 마신다. 40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봉이 김선달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김선달은 정말 물을 판 것일까?
이야기 속에서는 김선달이 물지게꾼들에게 미리 돈을 주고 마치 물을 길어갈 때마다 자신에게 돈을 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양에서 온 상인들을 속아넘어가게 한 황당한 사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배포요, 대단한 지략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황당함 때문에 재미있다.
아무도 돈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강물에, 김선달은 어느 날 갑자기 ‘값’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그가 팔았던 것은 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물에다가 새로운 가치와 이야기를 담아 얹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생수를 사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수돗물을 틀면 물이 나온다.
그런데도 우리는 생수를 산다.
왜일까.
물 자체가 없어서가 아니다. 편리하기 때문이고, 휴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의 품질이 관리되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물을 만드는 브랜드의 스토리 때문이기도 하다.
제주도 화산 암반수인지, 깊은 지하에서 길어 올린 암반수인지, 눈 덮인 산과 맑은 공기, 깨끗한 자연 알프스의 산자락에서 만들어낸 물인지...
이젠 물에게 저마다의 출생지가 생긴 것이다. 같은 물인데도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면 우리는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그 물이 오랜 시간 바위 사이를 지나왔다는 이야기,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특별한 수원지에서 온 물이라는 이야기가 붙는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물의 일부가 되어 가격표와 함께 우리 앞에 놓인다. 우리도 모르게 봉이 김선달에게 대동강 물을 사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봉이 김선달을 다시 읽으면 조금 묘한 기분이 든다. 그는 남의 물을 팔았던 사기꾼으로 기억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무엇에 돈을 지불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던거다.
공짜였던 강물에 가격을 붙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물을 ‘사야 할 이유’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더 재미있다. 1980년대의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봉이 김선달은 생각해내다니..
그리고 난 지금,
아주 기분 좋게 기꺼이
봉이 김선달의 손님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