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뭐 해 먹어요?”
여름이 오면 한 번쯤 주고받게 되는 인사다. 오늘은 무엇을 먹었느냐는 평범한 물음이지만, 유난히 더운 날에는 그 말이 안부처럼 들린다. 불 앞에 오래 서 있기도 싫고, 입맛은 어딘가로 숨어버린 것 같은 계절. 그럴 때 사람들은 저마다 여름을 견디는 음식을 꺼내 놓는다.
얇게 썬 오이에 차가운 물을 붓고 식초와 소금, 설탕을 조금 넣은 오이냉국. 얼음 몇 조각을 띄우면 그릇 가장자리까지 서늘해지는 것 같다. 한 숟가락 떠먹으면 새콤한 국물이 목을 지나고, 더위에 지쳐 있던 몸이 잠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인데도 이상하게 여름이면 생각난다. 아마 우리는 맛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맛과 함께 찾아왔던 계절까지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붉은 빛이 곱게 우러난 오미자차도 그렇다. 얼음을 가득 넣은 잔에 오미자물을 따르면 투명한 붉은빛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달면서도 시고, 조금은 떫고 쌉싸래한 맛. 여러 가지 맛이 한꺼번에 난다는 이름처럼 여름이라는 계절도 꼭 하나의 맛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즐겁다가 지치고, 반갑다가도 얼른 지나갔으면 싶다. 뜨거운 햇살이 원망스럽다가도 어느 저녁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 문득 아쉬워진다.
그리고 여름 하면 역시 냉면이다. 차가운 육수에 면을 풀고 겨자를 조금 넣은 뒤 식초를 한 바퀴 두른다. 그릇 가장자리에는 살얼음이 떠 있고, 면 위에는 오이와 무, 달걀이 가지런히 놓인다. 땀을 흘리며 식당에 들어갔다가 냉면 한 그릇을 받아 들었을 때의 기쁨은 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작은 호사다. 너무 차가워 이가 시린데도 자꾸만 젓가락이 간다. 더운 날 차가운 것을 찾는 것은 어쩌면 몸이 스스로 계절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콩국수 한 그릇도 빼놓을 수 없다. 진한 콩물에 국수를 말고 오이채를 올린 뒤, 소금을 넣느냐 설탕을 넣느냐를 두고 식탁 위에서 작은 논쟁이 벌어진다. 누군가는 소금이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설탕을 넣어야 제맛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서로 다른 입맛을 이야기하며 한 끼를 먹는 풍경 자체가 여름의 한 장면이 된다.
잘 익은 수박을 반으로 가르는 소리도 여름에만 또렷하다. 칼끝이 껍질에 닿는 순간 ‘쩍’ 하고 갈라지며 모습을 드러내는 붉은 속살.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한 물이 입안에 가득 찬다. 어린 시절에는 수박씨를 누가 더 멀리 뱉나 장난을 치기도 했고, 냉장고에 넣어둔 수박을 가족이 모두 잠든 밤 몰래 한 조각 더 꺼내 먹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음식에는 맛보다 시간이 더 많이 들어 있다.
한여름의 식탁을 떠올려 보면 이상하게 거창한 음식보다 소박한 것들이 먼저 생각난다. 찬물에 밥을 말아 잘 익은 김치 한 조각을 얹어 먹었던 날, 열무김치 국물에 국수를 말아 후루룩 먹었던 점심, 얼음이 녹아 조금 싱거워진 미숫가루, 냉장고에서 막 꺼낸 복숭아 한 알. 우리는 그런 것들로 뜨거운 날들을 하나씩 건너왔다.
그런데 어느새 아침저녁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한낮의 햇볕은 여전히 뜨겁지만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바람 끝에 전과는 다른 기운이 묻어 있다. 해가 저무는 시간도 조금씩 빨라졌다. 퇴근길 하늘을 바라보다 보면 여름이 한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 전 같은데, 벌써 그 계절의 끝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싶어진다.
계절은 언제나 그렇게 지나간다. 시작할 때는 너무 선명해서 끝이 없을 것 같고,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자리를 내어준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그늘을 찾아 걷고, 에어컨이 켜진 공간을 반가워했다. 밤이 되어도 식지 않는 공기에 뒤척인 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는데, 정작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허전하다.
아마 계절이 아쉬운 것은 그 안에 우리가 보낸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여름휴가를 떠났을 것이고, 누군가는 바쁜 일상 때문에 휴가다운 휴가 한번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물놀이장을 다녀왔을 테고, 누군가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바카라 한 권을 읽었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하루 역시 모이고 모여 한 계절이 된다.
냉면 한 그릇을 먹었던 날도, 얼음 동동 띄운 오이냉국을 만들었던 저녁도, 시원한 수박을 나누어 먹었던 밤도 모두 그렇게 우리의 여름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계절의 끝에서는 무엇을 했는가보다 어떻게 지나왔는가를 묻게 된다.
당신의 여름은 어땠는지.
잘 지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