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경로

1장 [창세기] 2화

by아제

"쿠구구궁!! 쿠궁!!"


요란하게 천둥 번개가 쳤다.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하느님씨가 우리 집에 들어앉은 뒤로 해를 본 적이 없었다.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면 계속 맑음이었다. 뉴스 화면 속 사람들은 쨍쨍한 햇살 아래서 하하 호호 거리를 걷고 있었다. 딱 우리 집만 여전히 천둥번개에 휩싸여 있었다.


분명 하늠씨! 아니, 하느님씨 짓이었다. 흥분해서 발음도 헛나온다. 계속 햇빛을 못 봤더니 우울해졌다. 암만 생각해도 현관문만 나서면 햇빛 찬란한 날씨가 펼쳐지고 있을 것 같은데, 현관문이 도무지 열리지 않아 나갈 수가 없었다.


하느님씨에게 당신 짓이지!라고 따져 물었지만 생사람 잡는다며 요란한 역정만 들었다.


울분을 달래기 위해, 세 쪽만 쓰면 되는 모닝페이지를 매일 열 쪽, 심지어 스무 쪽까지 쓰고 있었다. 아무런 분도 풀리지 않았다. 너무 힘껏 눌러쓰다 종이가 파여 쭉 찢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 열 대 때리고 풀지. 정말 뒤끝작렬, 유치찬란, 치사빤스형 성격이다. 안 되겠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이것도 한 번 드셔 보세요. 하느님 드시라고 특별히 만든 거예요." 억지 미소로 하느님 앞접시에 음식을 덜고 있는 내 모습이 한없이 비굴했다.


"흠... 머리도 나쁜 놈이 맨날 사기나 치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요리는 좀 하는 모양이다? 별일일세?" 하면서도 연신 젓가락질을 했다. 음식이 입에 맞나 보다. 잔뜩 차린 음식으로 상다리가 휘어지다 못해 부러지려고 했다.


"근데 무슨 일이냐? 여기다 뭐, 약 탔냐?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그래봤자 소용없다. 난 안 죽으니깐." 그러면서도 계속 먹었다.


"약 탔지요! 멀리서 오시느라 힘드신 것 같아 제가 보약을 좀 타봤지요! 하하! 이제 저희는 한 식구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하느님!" 억지로 말하면서도 너무 가련해서 눈물이 한 방울 흐르려는데...

"뭐냐? 원래 울보냐?"

퉁명스러운 말에 심통이 올라 눈물이 쏙 들어갔다.

"어유. 누가 울어요. 청량고추가 많이 맵네요. 많이 매워, 이 놈의 시키!" 고추를 우두득 씹었다.


한참을 먹더니, 드디어 숟가락을 내려놨다.

"디저트 같은 건 없냐?"

"왜 없어요, 다 준비돼 있죠!"

디저트까지 싹싹 비우고는 낮잠까지 씩씩 자러 방으로 사라졌다.


"탁! 타다닥! 탁! 타닥!" 키보드 두들기는 걸 멈췄다.


"에잇! 하늠씨인지 하느님씬지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진도가 많이 밀렸어. 이걸 언제 다 쓰지? 휴우우..."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내가 쓴 글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

"뭐 하냐?" 모니터를 가리면서 허여멀건한 얼굴이 쑥 하고 나타났다.


"으악!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튕기듯이 벌떡 일어섰다.

"아잇 뭐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무 데서나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요?"

"내 맘이지 얌마. 뭐 나쁜 짓 하고 있었냐?"

하느님씨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 안을 마구 돌아다녔다.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데 방에서 나갈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저 일해야 하거든요? 계속 계시면 일을 못한다구요!"

"흐음. 너, 작가냐? 아니, 작가일 리가 없는데? 작가를 하기에는 머리가 너무 나쁘잖아! 근데 도대체 뭘 쓰는 게냐?" 어깨너머로 내 글을 보며 계속 주절 거렸다. 진심으로 정신 사납다.


"쓰고 있는 바카라이 있다고요!... 근데요, 제가 진짜 일을 해야 해서요... 웬만하면 이제..."


"바카라 제목이... '미지의 경로'냐? 무슨 경로당이냐?" 오, 지저스! 제발 관심을 꺼달라고!

"경로당이 아니라 경로요, 경로!! 길! 트랙!! 원하는 것을 우주가 만들어 줄 때 '미지의 경로'를 통해 만들어 준다는 원리를 설명하는 바카라이라고요!!"

"미지의 경로로 뭘 만들어낸다고? 우주에는 그런 길이 없는데?"

"그런 길이 실제로 있다는 게 아니고요! 하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딱 10초 줄게 설명해 봐라."


마침 어느 드라마에서 봤던 기막힌 말이 떠올랐다.

"제가 아주 쉽게 딱 설명할게요.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간절하게 바라면 언젠가 어떻게든 이뤄진다.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무인도의 디바》


"여기서 말하는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이게 바로 제가 말하는 '미지의 경로'거든요?"

"그 말 한 번 참 어렵게 한다? 생각지 못한 방식이란 말이 훨씬 쉽고 좋구먼! 그걸 왜 또 굳이... 미지의 경로라는 어려운 말로 바꾸냐?"

"아잇, 진짜! 이 정도는 다들 쓰는 말이거든요? 그리고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처 알지 못하는 경로를 통해 원하는 게 나타난다는 내용이 핵심이잖아요!"


"암튼 어떻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뭐 어쩌라는 게냐? 뭐가 어떻게 될지 아는 게 없으니 뭘 할 수도 없겠구먼."

"그러니까, 기존생각에 갇혀있지 말고, 마음을 열고 미지의 경로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들어라! 그래야 우주가 알아서 원하는 걸 만들어준다. 그렇게 해야 원하는 걸 받을 수 있다! 이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라고요!"


실제 사례로 얼마 전 여친 얘기를 해줬다. 골프 레슨을 받으려고 새 프로를 찾고 있었는데 도무지 적당한 사람이 찾아지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발 길을 끊었던 옷가게에 문득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쑥 옷가게에 들어가 수다를 떨다 보니 우연히 골프 얘기가 나왔고 옷가게 주인이 이전에 레슨 받았던 프로를 추천해 줬다. 그 프로는 여친 동네와 엄청 떨어진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도, 얘기가 잘됐다. 여친과 케미도 잘 맞아서 흔쾌히 출장 레슨을 해 주고 있다. 그 뒤로 그 옷가게에는 다시는 간 적이 없다.


"이제, 이해되셨죠? 이렇게 생각도 못했던 방법으로 레슨 프로를 찾았다니깐요?" 신나서 떠들고 있는데, 손을 휘휘 저으며 그만하라고 했다.


"어휴... 넌 참, 진짜 말이 많다. 근데 그게 왜 미지의 경로냐? 네 여친은 이미 프로 다 찾았는데?"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뭘 들은 거지?


"찾기 전까지는 막막한 미지였잖아요! 찾고 나니까 그게 그렇게 연결됐네 아는 거지, 그전까지는 전혀 몰랐잖아요!"

"아니다. 네 여친은 그 옷가게에 들어가면 뭔가 얻고 싶은 정보가 나올 거라는 촉이 딱 왔던 거다. 그전까지 헤맬 때가 미지인 거지 옷가게 들어간 순간부터는 미지가 아니잖냐!"

"아직 프로를 만나기 전이니까 미지가 맞죠! 프로를 만나야 해결된 거지 아직은 아니잖아요!"

"됐고, 화장실이란 게 똥이 딱 마려울 때 싸러 들어가는 거 아니냐? 근데 네 말은 일단 화장실에 죽치고 들어가 앉아서 똥 나올 때까지 거기서 먹고 자고 하라는 얘기 아니냐! 진짜 개똥 같은 얘기다!"


그러면서 "미지의 경로"라는 바카라 제목부터 신랄하게 까댔다. 제목이 그따구니까 내용도 그따구라는 얘기였다. 올바른 제목은 "척 보면 딱 안다", "촉은 알고 있다"와 같은 것이 돼야 한다고 박박 우겼다. 탈출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미지의 경로는커녕 무지의 경로라며 침을 튀겼다.


나는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를 만들기 이미 10년 전에 어떻게 캘리그래피를 배울 수 있었겠냐, 그것도 미지의 경로 사례라고 주장했다. 하느님은 "척하면 딱" 알아보지 못하고 10년씩이나 걸린 스티브 잡스가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졌지? 졌지? 크흐흐흣!!! 이겼다!!!"


'이런 사람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눈다는 건 시간 낭비다. 아예 입을 닫아 버리자.' 대꾸도 하기 싫었다.


이겼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기분이 풀린 걸까?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며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다고, 인마, 뭘 또 그렇게 기가 죽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게냐? 그깟 바카라이야 새로 다시 쓰면 되는 거지."


쳐다도 보기 싫다.


"그래, 알았다. 네가 오늘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으니 같이 현장 학습을 가자. 네가 말한 미지의 경로인지 개뿔인지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내가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 주마!"

"?????"

"뭐 하고 있냐? 얼른 와라!!"


어차피 바카라을 쓰긴 글렀고, 엉겁결에 하느님을 따라나섰다. 어쨌건 밖에 나오니 햇님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칙칙했다.


"햇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하느님을 따라 도착한 곳은 육상 경기장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원형 트랙을 돌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수천 명은 돼보였다.


"얌마, 너만 모르지, 여기가 바로 미지의 경로라고 불리는 트랙 경기장이다.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안다니까?"

"여기가 '미지의 경로'라고요? 여기가 왜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다시 경기장을 봤다. 조금 전과 변함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거대한 쳇바퀴 속을 돌며 쉬지 않고 달리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경기장 스피커에서는 비트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를! 사랑의 노래를! 미지의 세계를! 찾아서 떠나요!" 언제 적 조용필 노래인가. 여기는 나이가 꽤 있으신 분들만 오시나 보다.


"봐라, 저 지친 표정을. 지옥 같은 트랙에 갇힌 표정을! 그런데 마음을 열고, 뭐 이런데로 뛰어 들어오라고? 얌마, 어떻게든 여기서 탈출하는 게 답이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미지의 경로와 육상 트랙에서 뛰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이곳이 왜 미지의 경로고 탈출은 또 뭐란 말이냐?


미지를 넘어서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이비 교주에게 잡혀온 듯한 찝찝한 기분이었다.


"두고 보면 안다. 하긴, 네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겠다. 봐봤자 모를 거 괜히 오라고 했나 보다."

"무슨 말인지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니까요?"


그때 품에서 회중시계처럼 생긴 걸 꺼내어 확인해 보더니, "오, 오, 내가 이 시간쯤 방송을 하라고 했다. 자, 잘 보거라."하고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경기장에 울려 퍼지던 음악이 갑자기 뚝 멈췄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하느님 말대로 장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 방송과 미지의 경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장내에서 열심히 운동 중이신 여러분들께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경기장 내에 계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오신 사업가 한 분이 오래전 생명의 은인을 찾고 있습니다.


에... 사업가 성함이... 네, 미스터 하으느어님이십니다. 베트남에서 오신 하으느어님 씨께서 오래전 생명의 은인을 찾고 계십니다.


은인의 당시 이름은 기억하지만, 은인 분이 개인 사정으로 이미 신분과 외모도 전부 바꾼 걸로 알고 계시다고 합니다. 당시 이름밖에 기억하지 못하신다니, 방송하는 이름을 듣고 ‘어, 이거 난데?’ 싶으신 분은 리셉션 데스크 앞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과거에 못 갚았던 마음의 빚까지 해서 사례금으로 현금 20억 원을 주신다고 합니다. 와우! 현금 20억 원입니다!


자, 당시의 은인 분, 하으느어님 씨 생명의 은인 분 성함은... 자, 김, 미지 씨, 김미지 씨! 본인이 당시 김미지 씨였던 분은... 리셉션 데스크 앞으로 지금 와주세요!"


무슨 이런 믿을 수 없는 방송이 다 있냐? 그리고 베트남에서 온 하으느어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수상한 이름 아닌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경기장 내에 계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오신 하으느어님 씨께서 오래전 생명의 은인을 찾고 계십니다.


장내에 계신 분들 중에 당시 이름이 김미지 씨, 김미지 씨였던 분이 계시면 지금 리셉션 데스크 앞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김미지 씨..."


갑자기 "우다다다당탕!"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면서 땅이 크게 흔들렸다.


"하느님!! 이게 뭐예요?! 지진 났어요? 우와앗!!"


경기장에서 트랙을 돌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한 방향을 향해 물소 떼처럼 돌진하고 있었다. 먼지가 흩날리고, 사람들 몸뚱이들이 부딪히고, 몸싸움이 벌어지고, 알 수 없는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다.


"김미지 씨... 김미지 씨..." 장내 스피커가 계속 울린다.


"우당탕 쿵쾅 콰과과곽 우당탕탕!!"


"김미지 씨... 김미지 씨..." 스피커는 계속 쾅쾅거린다.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김... 미?..." 너무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은 채 하느님을 쳐다봤다.


하느님은 피식, 피식, 끅, 끅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여유만만한 승자의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아래로 끄덕였다.


"맞다. 이 경기장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김미지만 찾아 모아 놓은 곳이다. 전국의 미지들이 모여 뱅뱅 돌며 뛰고 있는 진짜 '미지의 경로!!' 크크크크크!!! 아, 웃겨, 큭!! 큭!! 으하하!! 너도... 웃기지?! 큭큭!! 핫핫!!" 배를 잡고 흔들며 깔깔거리다가, 풀짝폴짝 백텀블링까지 했다.


“아... 이거라고? 미지의 경로가... 이거라고? 하아..."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재 개그를... 이렇게 초대형으로? 이런 자원 낭비가...!" 한숨밖에 안 나왔다.


그런데... 다다다다 뛰어가는 사람들 무리 중에서 힘든 표정으로, 그러나 굴하지 않는 눈빛으로 어기적 어기적 뛰어가는... 깡마른 팔순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저 할배도 이름이 김미지... 였다고? 세상에... 이걸 믿으라고? 엄마야... 진짜... 너무 하네.' 내 두뇌가 증발해서 두개골 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미스터 하늠니음! 오, 미스터 하늠니음! 내가 진짜 김미지라고! 그동안 남자로 위장을 한 거뿐이라고... 믿어줘요!" 리셉션 쪽에 가까워지자 할아버지가 갑자기 여성스럽게 배배 꼬면서 뛰기 시작했다.


"아... 말도 안 돼." 허탈감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시 주변을 봤더니 그새 하느님이 보이지 않았다. 물소 떼가 휩쓸고 지나간 뒤 휑하니 텅 빈 트랙만 보였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치사하게 나만 버려두고 혼자 가셨다? 에잇, 됐거든?! 나도 집에 갈 거야!”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데 저만치에서 "헛, 둘! 헛, 둘!" 하는 구령 소리가 들렸다.


앗! 아직 한 마리의 물소가 남아 있다! 물소처럼 큰 덩치의 중년 남자였다. 혼자 남아 땀을 뻘뻘 흘리면서 텅 빈 트랙을 뛰고 있었다.


"아니, 선생님! 여기 있던 사람들 전부 다 갔는데, 왜 선생님만 혼자 남아서 뛰고 계세요? 솔직히... 믿을 순 없지만... 만약 선생님도 김미지 씨면 남들처럼 20억 받을 기회가 왔을 때 얼른 갔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궁금했다.


"이 사람이! 헉헉!! 나를 어떻게 보고... 헉헉... 하는 말입니까? 아, 힘들어, 잠깐 쉬어야겠다... 헉헉."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저기 물소 떼들처럼 양심불량한 기회주의자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다 김미지일 리가 있습니까? 말이 돼요? 다 돈 받으려고 사기 치는 거지! 아무리 돈이 좋아도 사람들이 그러면 안 돼요. 다 자기 순서, 자기 기회를 믿고 기다려야지, 사람들이 말야, 진짜 양심들이 없어!"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선생님! 여기가 미지의 경로니 뭐니 하는 거, 개뻥 맞죠? 그냥 몰카 같은 거죠? 하느님이 저 놀리시는 거 맞는 거죠?"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쳐다 봤다.


"그러니까요! 선생님 말씀처럼 저 물소 떼가 어떻게 다 김미지고 아까 그 할아버지가 김미지냐고요! 말도 안 되죠! 아, 속 시원해! 참, 선생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하느님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고요, 미지의 경로니 뭐니, 그것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근데 내가 김미지면 그게 어울리는 이름인가요? 그건 말도 안 되는 게 맞죠. 이 덩치예요? 장난도 아니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나는 성씨부터가 김 씨가 아니라고요, 참나. 나는 이 씨라고요, 이 씨. 아, 내 이름이 뭐냐고요? 내 이름은요,

...

...

이!...

미지요. 이미지."


"헛, 둘! 헛, 둘!"


그는 다시 저만치 달려가 버렸다.


그날 이후 '미지의 경로' 원고는 미궁에 빠져 버렸다. 원고만 쓰려고 하면 수천 명의 김미지가 눈앞에 나타나 물소 떼처럼 달려들었다.


간신히 떨쳐내고 글을 쓰려 들면 이번엔 "헛, 둘! 헛, 둘!" 하면서 이미지 물소 아저씨가 컴퓨터 화면 위에서 러닝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한 글자도 더 쓸 수가 없었다.


또한 무슨 원고든 쓰려고만 하면 하느님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방해했다. 글을 하나라도 온전히 마쳐 보는 게 간절한 소원이 됐다.



결국 노트북을 덮었다.
내일은 미뤄 둔 피부과나 다녀와야겠다.





[다음 화 예고]


〈무지의 쳇바퀴〉
1장 [창세기] 3화

피부과에 간다고 나섰던 새가슴은 갑자기 우주의 흐름이 막히는 듯 불안하다며, 머릿속에 재난 영화를 편성한다.


폭주하는 새가슴에게는 하느님의 딴지도 먹히지 않는다.
급기야 하느님마저 질려 도망가 버리고...

홀로 남은 새가슴은 뜻밖의 낯익은 얼굴과 마주친다.

새가슴은 머릿속 재난 영화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 낯익은 얼굴은 왜 다시 나타난 걸까?

9월 13일(일)에 발행되는
3화 〈무지의 쳇바퀴〉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