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페이지에서 튀어나온 하느님

1장 [창세기] 1화

by아제

모닝페이지를 쓴 지 만 4년이 넘었다. 벌써?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계속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작심삼일의 화신이었던 내가 4년 넘게 이걸 하고 있다고?


나이 먹고 뒤늦게 철이 들었나 보다. 고개를 끄덕여 본다. 아니다. 솔직히 아직도 철이 안 든 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모닝페이지의 롱런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어쨌든 오늘 아침에도 노트 세 쪽을 썼다. 모닝페이지가 뭔가. 줄리아 카메론이란 미국의 작가가 "아티스트 웨이"라는 바카라에서 소개한 창조성 회복 도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바카라상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제정신이 말짱히 돌아오기 전에 손으로 A4 크기 노트 세 쪽을 꽉꽉 채워, 냅다 일필휘지로 쓰는 행위다. 어떤 제약도 두지 않는다. 문법, 표현, 단어, 다 틀리게 엉망진창으로 써도 되고 실컷 욕질을 해도 된다.


머릿속에 덕지덕지 엉켜 붙어있는 생각들을 떼어내고 털어내는 게 목적이지, 글을 쓰는 게 목적이 아니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어둡고 찐득찐득한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하자는 거다.


모닝페이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 올해는 진짜 잘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던 때다. 주변에서는 "설마 그럴 일이 있겠냐, 다들 너 좋아하고 성과도 좋은데 왜 그런 걱정을 하냐?"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촉이란 게 있다. 나를 자르겠다고 벼르고 있는 듯한 사람이 눈에 보였고 그 사람이 나가거나 내가 잘리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보였다. 게임은 보였지만 방어 위주의 게임밖에 할 수 없었던 나에게는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었다.


내 촉이 착각이었는지, 맞는 거였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불안은 진짜였다.


그때,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죽어라 모닝페이지만 썼다. 늦은 봄에 시작했던 모닝페이지는 연말에 실제로 잘렸을 때도 쓰고 있었다. 그 후 '앞으로는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를 고민하면서도 계속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넌 뭘 그렇게 죽어라 걱정만 하면서 사냐?"


분명 모닝페이지에 쓰이는 글이었지만 내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뭐지? 대체 누가 하는 말이지?


"누구세요? 그리고 제가 뭘 그렇게 걱정만 하면서 산다는 거예요?" 답변을 적었다.


"나? 나 모르냐? 내가 누군지 다들 아는데?"

"무슨 정치인이세요? 지금 선거철도 아닌데 왜 남의 신성한 모닝페이지에까지 나타나서 방해예요?"

"정치인? 하아 참. 지 도와주러 온 줄도 모르고 날 표 구걸이나 하는 정치인으로 보냐? 너 생각이 진짜 많이 비뚤어져 있구나?"

"됐고, 시끄러우니깐 가요. 안 그래도 속 시끄러워 죽겠는데 이상한 사람까지 나타나서 분탕질이네!"

"어허? 이렇게 날 그냥 보내면 분명 후회할 텐데?"

"내가 당신을 언제 봤다고 후회해. 빨리 가시라고요!"

"내 정체를 알면 생각이 바뀔 텐데?"

"무슨 스무고개 해요? 생각 안 바뀌고, 이제 이것도 한 페이지밖에 안 남아서 당신 말할 공간도 별로 없어. 썩 꺼지시라고욧!"


그런데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모닝페이지만 쓰면 다시 나타났다. 예의 그 능글능글하고 애매모호한 말투로 말이다.


"오늘도 참 걱정투성이네. 그 걱정을 다 쌓아 올리면 그 옛날 바벨탑 보다 높겠어!"


"또! 참견하지 말고 가라니깐? 어휴 무슨 찰거머리도 아니고."

"네 머릿속에 붙어 있는 걱정거리들이 찰거머리지, 내가 왜 찰거머리냐? 너, 머리가 나쁘구나? 대학은 나왔냐? 아니 고등학교는... 그것도 검정고시냐? 흐흐."

"아니, 이 사람이? 제가 나름 학벌은 어디 가서 절대로 꿀리지 않거든요? 뭘 좀 알고 얘기를 하시라고요!"

"아하! 학벌이 좋으셔? 그러셔? 음... 딱 봐도 학력위조구먼. 이 놈 사기꾼이네, 사기꾼이야. 헐."

"지금 뭔 소리를 하세요? 말하는 건 본인이 딱 사기꾼이구만! 누가 누구보고 사기꾼이래?!"

"발끈하는 거 보니까 사기꾼 맞네, 맞아."

"사기꾼 아니라니까욧! 제가 얼마나 진실된 사람인데, 진짜, 이 목소리 도대체 누구야?! 야! 너 귀신이냐? 어허이! 잡귀야 물렀거라!!" 당장 뭘 할 수가 없어서 모닝페이지에 계속 '소금!', '소금!', '소금 한 뭉치!', '옛다, 소금 바가지 세례 받아라!', 이렇게 계속 써 나갔다.

"귀신이라니, 얌마! 어디 나 같이 고상한 존재에게! 이 놈 진짜 돌대가리네? 그러니 맨날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나 하고 앉아있지! 이런 머리로 사기나 제대로 치겠나? 하이고야... 인생 노답인 놈일세, 쯧쯧."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귀신이든 아니든 빨리 사라지시고 다신 오지 마시라고요!" 그리고는 대꾸가 나오기 전에 얼른 모닝페이지 마지막 페이지를 채우고 노트를 닫아버렸다.

"에잇! 뭐야! 잡상인도 아니고!" 센 척했지만, 혹시 귀신? 하는 생각을 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모닝페이지 세션 때 어김없이 다시 나타났다.


"오늘도 또 걱정 투성이네? 걱정을 쌀로 바꿔주면 곧바로 만석꾼이 되겠는데? 흐흐!"


"이거 보세요. 오늘은 왜 첫 페이지부터 막 나오고 그러죠? 오늘은 저 혼자 풀어내야 할 생각이 엄청 많은데! 이런 공간까지 막 침범하면 이거야말로 사생활 침해 아닌가요? 계속 이러면 진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푸하하하하! 진짜 재밌는 놈이라니깐! 크크. 가만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냐? 내가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크크!"


"어휴... 내가 이 귀신 때문에 모닝페이지를 접어야 하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모닝페이지를 왜 접냐? 그건 아니지. 그리고 내가 귀신 아니라고 말했잖냐! 하여간 얘는 머리가 나빠서...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대화를 못 하겠다... 내가 밖으로 좀 나가야겠다... 쫌만 기다려라... 영차!"

"뭐요? 어딜 나간다고요? 도대체 뭔 소리예요?"


그때 펼쳐진 노트면에서 희끄무레한 얼굴이 하나 쑥 하고 올라왔다.

"헉!... 이게 무슨..."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말문이 막혔다. 펜을 쥔 손도 바들바들 떨렸다.

"잠깐만.. 기다... 리라.. 곳!" 벌써 상반신 전체가 노트면 밖으로 쑥하니 나왔다. 이제는 양손으로 노트면을 짚고 세차게 누르면서 하반신을 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얍!" 하는 기합과 함께 사람의 형상을 한 존재가 노트밖 현실 세상으로 완전히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악!! 귀신이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귀신 아니라니깐!!"

"으아아아악!! 괴물이닷!!!"

"내가 왜 괴물이냐! 괴물 아냣!"

"그럼... 넌 뭐냣!!! 요?!!"

"나는... 하느님이다!!"

"으아아아아!! 사기꾼이다!!!"

"얌마! 진짜야!! 나 진짜 하느님이야!!"

"으아아아아!! 개뻥구라마이신이다!!!"


"얌마! 정신 차려! 내가 진짜 하느님이라고! 그리고 거기 팔 좀 내리고! 내가 너한테 총을 들이댔냐? 왜 계속 만세를 부른 채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게냐? 나, 참, 어이가 없네." 그 존재가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흔드는 바람에 정신이 돌아왔다.


놀라운 비현실감에 얼굴을 꼬집어도 보고 혼자 뺨을 때려보기도 했지만, 그 존재가 내 눈앞에 존재하는 건 완벽한 물리적 현실이었다.


"진짜... 하느... 님... 이라고요?"

“나 참, 그렇다니까 그러네. 넌 평생 속고만 살았냐? 내가 지금 네 눈앞에 이렇게 떡하니 등장하는 걸 봤잖냐! 지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못 믿겠다는 거냐?”


"혹시... 구미호실 수도... 있잖아요."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내 간 부위를 움켜쥐었다.

"아, 진짜! 너는 도대체 드라마를 얼마나 많이 본 게냐? 진짜 간을 확 빼먹을까 보다... 어허! 야 인마! 어딜 만지냐!" 내가 손으로 하느님 얼굴과 몸을 더듬고 있었다.

"아, 진짜네. 혹시 홀로그램인가 해서 한 번 확인을 하느라고요... 실례가 됐담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를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너희들이 말하는 그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인 걸 믿을 것 같으냐?"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해도 못 믿을 것 같은데요?"

"아, 이놈 머리 나쁜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답답하고 꽉 막힌 놈일 줄이야... 야 인마! 내가 널 측은히 여겨 친히 도와주러 왔다니깐?"

"제가 뭐 힘든 게 있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측은한 것도 아닌데 하느님이 굳이 왜 여기까지 도와주러 오겠냐고요? 저는 그것부터가 믿기 힘들어요"


이후 몇 시간이나 계속 옥신각신 했지만 둘 다 자기 의견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하느님이 중간에 본인이 하느님이라는 걸 입증하겠다고 천둥 번개를 부리기도 했다. 나는 그건 천둥의 신 토르도 할 수 있는 거라며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뿔이 난 하느님이 성경 속에 나오는 기적이라며 바다를 반으로 가르는 것도 보여줬다. 나는 그런 자연 현상은 우리나라 남쪽 바다에서도 흔하다며, 꼴랑 그걸 보여주고 하느님이라고 믿으라는 건 억지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 이러다가는 아무리 밤을 새워도 끝이 안 나겠어요. 제가 졌어요.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하느님, 인정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씀하시는 게 다 맞는데... 제가 너무 우긴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얌마! 진작 그럴 것이지! 너 때문에 오른 내 혈압이 태풍으로 쏟아질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아, 참, 나, 끝까지 사기꾼 같은 표현은 좀 삼가시고요. 이제 믿겠다잖아요!"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느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제, 제대로 이해했어요. 어쩐지! 한국말을 엄청 잘하시기는 하는데, 뭔가 살짝 어색하긴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하'씨 성으로 귀화하신 거잖아요. 이름은 '느님'이고요. 그럼 이제부터 제가 하느님 씨! 이렇게 불러드리면 되는 거잖아요? 저는 '느님'이란 이름이 계속 좀 이상해서... 세상에 이런 이름이 어딨어! 하고 못 믿고 있었거든요. 근데... 이름은 원래 쓰시던 이름의 발음을 가져오신 거잖아요, 그쵸? 아잇, 제가 그 생각을 못했잖아요! 아무래도 발음상... 베트남? 아닌가? 아무튼 동남아 쪽이신가 봐요? 음... 근데 그쪽 지역치고는 피부가 지나치게 하얀 편이신데? 진짜 동남아 맞나? 어쨌든 이제 '하 느님' 이신 거 백 퍼센트 인정하고 믿습니다, 하! 느! 님! 씨! 이제 됐죠?"


하느님 얼굴이 울긋불긋 벌겋게 변하더니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꽉 깨문다. 갑자기 하늘을 향해 한 팔을 쭉 뻗어 올린다. 슬롯머신을 당기듯이 그 팔을 세차게 밑으로 당기자 하늘에서 커다란 이민 가방들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너는... 나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가 갈릴 때까지... 얘기를 좀 나눠야겠다. 나, 오늘부터 이 집에서 살 테니 그렇게 알아라! 에잇! 천하에 돌대가리 새끼!"

자기 맘대로 방을 정하더니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아니, 하느님씨! 저기요! 여기가 호텔이 아니거든요?! 아니, 하느님씨! 적어도 방세는 합의를 하셔야죠!!"


이후 방을 빼지 않고 쭉 살고 계시다. 물론, 방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신 적이 없다.



그날 밤, 자기 전에 늘 하던 대로 두 손을 모았다.
'우주님, 미지의 경로로 꼭 대박 나게 해 주세요.'

닫힌 방문 너머에서 하느님의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미지의 경로라... 미지... 경로... 크크크."





[다음 화 예고]


〈미지의 경로〉

1장 [창세기] 2화


새가슴은 우주가 ‘미지의 경로’를 통해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만들어 준다고 굳게 믿는다.

졸지에 ‘하느님 씨’가 되어 뿔이 난 하느님은

“그딴 것은 없다”며 딴지를 건다.


급기야 하느님은 새가슴이 틀렸다는 것을

새가슴의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 주겠다고 한다.


이번에도 새가슴이 끝까지 우길 수 있을까?


9월 11일(금)에 발행되는

2화 〈미지의 경로〉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