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무지의 자각] 5화
"뿌 뿌 뿝뿌뿌 뿝뿌뿌뿌 뿝뿌루뿌뿌 뿌뿌뿌 뿝뿌루뿌!!"
요란한 기상나팔 소리가 잠을 깨웠다.
월요일이다.
"뭐야 아침부터! 아, 시끄러워! 알람도 꺼놨는데 갑자기 군대야 뭐야!"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한참 꿈을 꾸고 있었다. 뭔가 깊은 뜻이 있어 보이는 상징적이고 오묘한 꿈이었다. 이건 또 무슨 뜻일까 하는 철학적인 생각 속에서 우아하게 눈을 뜨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시끄러운 나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뜨니 머리맡에 하느님이 떡 하니 앉아 신나게 나팔을 불어제끼고 있었다. 뭐냐! 아침 댓바람부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는 철저한 정신개조가 필요하다. 기상!!!" 소리 지르며 하느님이 이불을 훌러덩 들어 던졌다.
"뭐예요, 아침부터! 도대체 지금 몇 시예요?!"
"몇 시긴! 진작 일어났어야 하는 시간이지, 이놈아!!"
등짝을 처맞으며 꾸물꾸물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으하함!" 하품을 하면서 '진짜 의미 깊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에잇 씨, 다 잊어버렸어!'하고 아쉬워했다.
"앗 차가!" 찬물 세례가 날아왔다.
"아! 진짜! 일어났잖아요!! 이... 씨!!" 눈에 힘을 빡 주고 노려봤지만 하느님은 눈길도 주지 않고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다. 어라? 군복을 빼입은 채 지휘봉까지 들고 있었다.
"에... 귀하는 정신 상태가 매우 불량한 관계로 지금부터 한 달 동안 집중 정신 개조 훈련에 들어가겠습니다. 자, 따라 합니다, 정! 신! 개! 조!"
"에?.... 뭐래?...."
"팅!" 지휘봉이 내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따라 합니다! 정! 신! 개! 조!"
"윽!... 알았다고요!... 정, 신, 개, 조..."
"건강한 정신은 어디에 깃든다? 대답합니다!"
"...모닝... 페이지요?"
"팅!" 지휘봉이 다시 머리를 내려쳤다.
"건강한 정신은 강인한 육체에 깃든다! 알겠습니까!"
큰일 났다. 다시 군대에 온 건가? 세상에서 나하고 제일 안 맞는 곳이 군대인데?! 아, 뭐 이따위 하느님이 다 있지?! 도대체 월요일 아침부터 왜 이 난리인 거야?
그러다 어젯밤 하느님하고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몸은 제대로 만들고 있냐?"
"그럼요! 매일 푸시업, 스쾃, 브리지를 25개씩 하고 있어요. 오늘은 크런치와 레그 레이즈까지 추가했다고요!"
"몇 개씩?"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묻는다.
"25개씩이요! 25개씩 1세트!" 당당하게 대답했다.
"하이고야... 3세트도 아니고, 1세트? 장난하냐?"
"무슨 소리세요! 하느님, 스몰 스텝 모르세요? 한 번에 너무 많이 하려고 하면 중간에 포기해 버린다고요! 그래서 일부러 딱 한 세트씩만 하는 거예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또 묻는다.
"너 쓸데없는 걱정하는 건 좀 치웠냐? 생활비니 뭐니 궁상떠는 거 말이다."
"그 걱정이야... 계속 좀 있죠. 그 걱정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제가 더 잘해야죠, 뭐. 에휴."
"뭘 어떻게 잘할 건데?" 이렇게 훅 질문 들어온다고? 나한테 이렇게까지 관심 없었잖아?
"아니, 주식으로 먹고사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몇 년째 시도를 해오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거기서 길을 찾아봐야죠... 성과는 없고... 벌기보다 잃기 바쁘지만요..." 내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 물론 주식에만 의존하는 건 진짜 직업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글을 쓰고 있잖아요. 아직 아무도 제가 글 쓰는 사람인 줄은 모르고... 글로는 한 푼도 못 벌고 있긴 하지만요..." 목소리가 모기 소리만 해졌다.
"세상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그러니깐 네 정신 상태가 가출한 지 한참 된 거다! 혼자서는 절대 답이 안 나오는 놈이 왜 몇 년째 혼자 끙끙거리고 있냐? 진짜 답답한 놈 같으니라고!"
"아니, 그럼 그걸 혼자 고민하지 누구랑 같이 뭘 해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잘못하다 사기나 맞게요?"
"하여간 저, 저 돌대가리 놈의 시키, 쯧쯧..."
"그럼 어쩌라고요! 하느님이라고 옆에 있어도 하나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그딴 건 갑자기 왜 물어보고 그런데요?"
"내가 언제 안 도와줬냐? 내가 얼마나 널 많이 도와줬는데! 이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이건 또 뭐냐. 갑자기 무슨 메쏘드 연기인가? 하나도 안 어울린다. 이러다 또 갑자기 어떤 식으로 얼굴을 바꾸려고 이러시나. 심히 불안하다.
"내가 지금까지 널, 평생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진짜 모른다는 거냐?" 메쏘드 연기를 넘어 사기로 가는 건가?
"아니, 도대체 뭘 그렇게 도와주셨다는 거예요? 전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사실이잖냐.
"너 회사 그만 다니고 딴일 한다고 깝죽거리다 망하고, 간신히 다시 취직했을 때, 그게 네가 운이 좋아서 취직한 거 같냐? 내가 아니었으면 취직이 됐을 것 같냐? 그 온라인 게임에서 2년 만에 잘렸을 때, 그때는 또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냐? 한심한 놈. 그때 잘렸으니까 더 좋은 데로, 또 더 좋은 데로 계속 옮겨서 빚도 다 갚고, 엉?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 항상 내가 뒤에서 다 만들어주고 있었던 걸 진짜 모르는 거냐?"
순간, 진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럼 뭘 하냐, 지금은 다시 힘든데.
"백 번 양보해서 그랬다 치자고요. 근데 지금은 왜 하나도 안 도와주시고 그 모양이세요? 그냥 지나간 거 갖다 붙이는 거 아니에요?"
"하이고야. 너 지금까지 3년 넘게 어떻게 살았냐? '내 힘으로만', '주식으로만' 돈을 벌 수 있다는 답답한 생각으로 살지 않았냐? 그딴 족쇄 같은 생각 속에 꽉 갇혀서 사는데 어떻게 도와주냐? 최소한 '도와주세요!'라고 해야 도와줄 수 있다는 것도 모르냐? 진짜 답 안 나오는 무식한 놈일세. 쯧쯧."
"아, 몰라요! 그럼 지금이라도 도와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시라고요!"
"족쇄부터 풀어라 이놈아! 그거 안 풀면 맨날 그 모양 그 꼴로 살 수밖에 없다니깐? 못 도와준다니깐?!"
"뭐야,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그냥 도와주면 되지 무슨 하느님이 자꾸 조건을 걸어요? 다 개구라뻥 같네요. 몰라요. 잘 거예요!" 그러고는 침대로 도망갔었다.
"팅!" 지휘봉이 머리를 내려쳤다.
"뭘 혼자 궁시렁 궁시렁이냐! 따라 합니다! 정! 신! 개! 조!"
"아잇, 아파요!... 근데요, 어제 그 족쇄 얘기는 대체 뭐예요? 자꾸 생각나잖아요!"
"오! 너 족쇄 얘기 잘 꺼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네가 정신개조가 필요하다는 거 아니냐! 정신개조를 해야 족쇄에서 해방될 것 아니냐 이 덜 떨어진 놈아! 따라 해라, 정! 신! 개! 조!"
"정신개조 백날 외친다고 정신개조 되나고요!"
"오, 간만에 맞는 말이네? 크크! 맞다! 정신개조는 입만으로는 절대 못한다." 서늘하게 씩 웃는다.
"맞죠? 그러니까 그만하시자고요."
"진짜 정신개조는 몸으로 해야 한다. 그래... 산이나 한번 갔다 오자. 실시!!!"
몸으로 정신 개조를 한다고?
그건 또 뭔 알 수 없는 소리냐?
잠깐만, 지금 산에 오르라고?
하느님이 뒷 베란다 창문 쪽을 손가락질했다.
뒷산을 가리키는 거였다.
"앗... 안 돼요! 오늘 비 온단 말이에요. 잠깐 그쳤지만 하루 종일 비 온다 했다고요!!"
"팅!" 지휘봉이 다시 머리를 내려쳤다.
"아! 아파요!"
"팅!", "팅!", "팅!"
"아프다고욧! 아! 아얏!... 알았어요! 아, 간다고요!"
30~40분이면 오르내리는 손바닥만 한 뒷산이지만, 한번 안 가기 시작하면 진짜 가기 싫어지는 산이다. 구시렁대면서도 꾸역꾸역 올라갔다.
다시 비가 와서 우산을 펼쳤다.
초반 가파른 구간에서 심장이 꿀렁거리고 숨이 헉헉거렸다. 우산을 들고 헐떡거리면서도 혼잣말로 툴툴거렸다.
"아니, 자기가 진짜 하느님이면 돈이나 좀 콱콱 만들어주지, 그딴 건 하나도 안 해주면서 뭐? 자기가 평생 나를 바카라임져 왔다고? 이건 뭐 봉이 김선달도 울고 가겠어. 헉! 헉! 아이고 힘들어!" 하면서 어기적 어기적 올라갔다.
숨이 좀 진정되니 그다음엔 입이 고삐가 풀렸다.
"해주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정신 개조? 이딴 건 도대체 왜 시키는 거야?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이런 날 산에 오르면 뭐, 정신개조가 되는 거야? 아, 진짜 마음에 안 들어!"
한 번 입이 터지니까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은 도저히 못 믿겠고, 아휴, 돈 들어오라는 확언이라도 하면서 걸어야지... 그놈의 정신개조 믿다가 망할지도 모르겠다!" 하고 계속 구시렁댔다. 투덜투덜 대다가는 갑자기 또 확언을 한답시고 "하느님은 나의 변함없는 공급자십니다. 하느님은 저에게 돈을 듬뿍..."하고 중얼중얼 방언을 터뜨리면서 걸었다.
비 때문에 사람들이 없어서 망정이지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안 됐네 쯧쯧" 하면서 다들 피해 갔을 거다.
원래 계획했던 코스가 있었는데, 가다 보니 처음 가보는 엉뚱한 길로 새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벌써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어? 안되는데? 벌써 내려가는 건 아닌데? 그럼 하느님한테 또 혼날 텐데?" 하면서도 그 길을 계속 따라갔다.
그때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 비면 다시 올라가는 게 맞지 않았다.
"혹시? 비가 많이 올 줄 알고 이 길로 가게 하신 건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사람은 절대 아니라니까? 빨리 내려간다고 타박할 사람이지."
주변을 살펴보니 하느님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디서 또 몰래 보고 있을지 모른다.
"하느님... 비가 많이 와서... 내려갑니다? 저, 내려간다고요?"
대답이 없으면 예쓰 아닌가. 그래서 하느님에게 들릴까 봐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비가 더 세차게 내리면서 그 목소리마저 지웠다.
"왜 네 맘대로 생각하세요?"라는 목소리가 언뜻 들린 것 같았다. 그러나 거센 빗소리 때문에 진짜로 들렸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아냐, 못 들었어, 아무것도 안 들렸다고!" 하며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급하게 걷다 보니 나뭇잎들과 자꾸 부딪혔다. 빗물에 흠뻑 젖은 나뭇잎들이 몸을 스치면서 "즈엉신", "그애조" 같은 소리를 계속 냈다.
잔뜩 컴컴해진 하늘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시의 길로 돌아와 있었다.
"아, 진짜 가기 싫었거든? 근데 막상 와봤더니 별 게 아니긴 하네? 비가 오든 말든 말이지."
이 쉬운 걸 왜 그렇게 저항했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따라 합니다, 정! 신! 개! 조!"
그럼 그렇지.
안 나타나면 내가 아는 하느님이 아니다.
"정! 신! 개! 조!"
어라, 나도 모르게 순순히 따라 했다.
그런데 왠지 몸이 가볍다.
꾸덕꾸덕하던 머릿속도 한결 맑아졌다.
그래서인가?
에라, 모르겠다,
하라는 대로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한 정신은 강인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은 강인한 육체에서!"
"하느님은 나의 사랑!"
"하느님은 나의... 엣?... 이건 좀..."
"팅!", "팅!"
"다시! 하느님은 나의 사랑!"
"정신 개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팅!", "팅!", "티잉!"
"다시! 하느님은 나의 사랑!"
"하느님은 나의... 살... 항!"
"잘했다! 이제 우산을 버리고 집까지 뛰어간다! 실시!"
"에잇! 으아아아아!!"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속을 뚫고 뛰었다.
시원하다.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얼굴에 방울방울 떨어져 흐르는 빗방울의 느낌, 축축하고 끈끈한 땅바닥에 착 붙었다 떨어지는 발의 느낌, 공기와 빗물 사이를 빠르게 가르는 온몸의 느낌만 있다. 빗 속을 뛰고 있는 포레스트 검프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을 모르는 포레스트 검프다! 이야호!" 하며 신나게 뛰었다.
현관에 도착해서 흠뻑 젖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어디선가 다시 나팔 소리가 들렸다.
"뿌뿌뿌뿌뿌 뿌뿌뿌~ 뿌뿌뿌뿌뿌 뿌뿌뿝~!!"
"아, 뭐야! 또 뭔데요?!"
"정신개조 1일 차, 통과다! 하지만 내일은 2일 차다. 내일은 더 빡세진다! 매일매일 점점 더 빡세진다! 크크크!! 기대해라. 내일 보자!"
깔깔거리며 백텀블링을 한번 하고는 휙 사라졌다.
빗소리, 그리고 나팔 소리의 여운을 들으며 내 머릿속은 다시 꾸덕꾸덕해졌다.
눈을 감고 주문처럼 속으로 외웠다.
'마음의 해방... 마음의 평화...'
빗소리가 어느새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다음 화 예고]
〈워터파크의 추억(I): 파도풀 속의 평온〉
2장 [무지의 자각] 6화
미래가 불안한 새가슴은 ‘마음의 평화’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평화가 아니라, 파도풀에서 여친과 함께 겁에 질렸던 여름날을 떠올리고 만다.
연이어 떠오른 경제적 걱정으로
미래의 재난까지 긴급 편성하던 새가슴에게,
하느님은 어이없는 해결바카라, ‘거지 보험’을 권하는데.
과연 불안에 빠진 새가슴은
파도풀 같은 망상에서 빠져나와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9월 20일(일)에 발행되는
6화 〈워터파크의 추억(I): 파도풀 속의 평온〉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