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재수, 처음으로 혼자 견딘 1년

by부지러너

집에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대학 세 곳에 모두 떨어진 뒤였다.

가군, 나군, 다군에 모두 소신 지원을 했고, 결과는 전부 불합격이었다.

일주일 가까이 집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부모님의 높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했던 삶에서 처음 마주한 큰 실패였다.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사실 수능을 보기 전부터 두려웠다.

외고에서 이과를 선택한 뒤 내신은 좋은 편이었지만,

수능 수리 영역과 과학탐구에는 자신이 없었다.

공부를 할수록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이미 선택한 길이었다.

되돌아가는 대신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첫 수능에서 우려했던 수리 영역의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재수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되었다.


매일 아침 일산역에서 기차를 탔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경의선 전철이 다니지 않았다.

문산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재수학원에 다녔다.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반면 매일 같은 시간에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 차이가 가장 서러웠다.

다행히 혼자는 아니었다. 외고 친구들 중에도 목표가 높았던 만큼 재수를 선택한 친구들이 꽤 있었다.

재수 생활 자체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1년이라는 시간이 다시 주어졌다는 사실이 위안이었다.

한 번 더 공부하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달라졌다.

모의고사 성적은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다.

주변에는 재수를 시작한 뒤 성적이 크게 오른 친구들도 있었다.

같은 시간을 공부하고 있는데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중학교 때 과학경시대회를 준비하면서,

고등학교에서 이과 심화 과목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한계를 다시 만났다.

노력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잘 맞지 않는 길이었던 걸까.


재수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의외로 공부가 아니었다.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아버지는 지방 온라인 게임에 다니셨고, 집에서 가장 자주 마주하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 역시 2년째 입시를 뒷바라지하며 지쳐 계셨을 것이다.

서로가 힘들었지만 서로에게 기대하는 결과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전화로 크게 다퉜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가출을 했다.

거창한 가출은 아니었다.

서울역 근처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인생에서 가장 큰 일탈이었다.

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 향하던 학생이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지 않은 날이었다.

그렇다고 다음 날부터 무언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학원에 갔고, 다시 공부했다.


두 번째 수능이 다가올 무렵에는 어느 정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바라셨던 의대나 치대에 진학할 만큼의 성적은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결국 두 번째 수능에서도 치과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대신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스스로는 긴 입시 생활을 끝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질바카라이 이어졌다.

전문직으로 향하는 길을 벗어났으니 앞으로의 삶이 불안정할 것이라는 걱정도 계속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2년 동안 최선을 다해 도착한 곳에서도 충분히 잘했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대학에 입학하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이과 대신 문과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다른 전공을 공부하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학생활의 즐거움 속에서 그 질문들은 다시 뒤로 밀려났다.

재수로 1년 늦었다는 생각에 1학년 첫 학기에는 유난히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전액 성적 장학금을 받았다.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장학금이 오히려 다른 길을 고민할 기회를 늦춘 것은 아닐까 싶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좋은 성적을 받았으니 계속할 이유가 생겼다.

이미 1년을 돌아왔는데, 다시 방향을 바꾸기에는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아까웠다.

어쩌면 두려웠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내려놓고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재수했던 1년은 실패를 견디는 법을 배운 시간이기도 했지만,

익숙한 길을 벗어나는 용기까지 얻은 시간은 아니었다.


실패보다 두려웠던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것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었다.


일산역의 아침 통학길.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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