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외고의 이과생

by부지러너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했으니 당연히 문과에 진학할 줄 알았다.

그보다 앞서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면서 이미 한 번 확인한 사실이 있었다.

수학과 과학을 잘하는 친구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그들과 함께 과학경시대회를 준비하면서 이과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학고 대신 민사고를 준비했고, 결국 외고에 입학했다.


이제는 문과 공부를 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예상하지 못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문과와 이과를 나눠야 했다.

아버지는 이과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이과에 진학해 전문직을 준비하는 편이 더 확실하고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는 문과적 성향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수학과 과학에 특별한 흥미나 재능이 있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설득할 만한 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열일곱 살의 학생에게는 자신의 적성을 설명할 경험도,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야기할 언어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과를 선택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선택이 외고에서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같은 학년 학생의 절반 이상이 이과를 선택했다.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설립된 학교에서

학생의 절반 이상이 이과 진학을 준비하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이미 이과와 의대에 대한 선호가 강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외고의 교육과정은 당연히 외국어 중심이었다.

전공 외국어의 필수 수업 시수를 채워야 했기에 이과 과목은 방과 후에 별도의 수업을 들어야 했다.

문과 친구들이 정규 수업을 마치고 자습을 할 때, 이과 학생들은 추가 수업을 들어야 했다.

외국어도 공부하고, 수학과 과학도 공부해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외국어고등학교라기보다 대학 입시를 위해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학원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주변 친구들 상당수가 같은 선택을 했으니 이상하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모두가 비슷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면 그 방향이 맞는지 묻기가 쉽지 않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

내신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3학년이 되면서 다시 한번 익숙한 벽을 만났다.

수능을 준비하며 수학의 미적분과 과학의 심화 과목을 공부할수록 한계가 느껴졌다.

특히 수학과 화학Ⅱ 같은 과목에서는 노력만으로 쉽게 메워지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다.

중학교 때 과학경시대회를 준비하면서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다.

주변에는 어려운 개념을 빠르게 이해하고 응용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받아들이는 속도와 깊이가 달랐다.

내신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지만, 수능은 다른 문제였다.

결국 대학 입시에서 수리 영역은 발목을 잡았고, 재수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과를 선택한 것을 매일 후회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해야 할 공부를 했다.

이미 선택한 길이었고, 주변 친구들도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다른 선택지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으니

지금 걷는 길이 자신에게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어쩌면 문제는 이과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조차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채 선택해야 했다는 것.

그것이 더 아쉬운 일이었다.


지금은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문득 고등학교 시절의 선택이 떠오를 때가 있다.

부모는 아이보다 세상을 먼저 경험했다.

어떤 직업이 안정적인지, 어떤 공부가 유리한지, 어떤 길에 위험이 적은 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부모의 조언은 아이가 미처 보지 못한 위험을 피하게 해 줄 수도 있다.

아버지 역시 더 안정적인 미래를 만들어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 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다만 부모가 알고 있는 세상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더구나 부모가 좋다고 생각하는 삶이 반드시 아이에게도 좋은 삶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정답을 먼저 알려주지 않으려고 한다.

운동이든 예술이든 공부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다를 수도 있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일이 막상 해보니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경험까지도 아이 자신의 것이었으면 한다.


물론 부모가 된 지금도 쉽지는 않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덜 힘든 길을 갔으면 하는 마음이 앞설 때가 있다.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 어느새 정답을 강요하는 말이 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과 선택이 완전히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선택 덕분에 공학을 공부했고, 엔지니어로 슬롯생활을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는 여러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다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한 가지는 달라졌으면 좋겠다.

문과와 이과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보다,

왜 그 길을 가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아이에게 바라는 것도 비슷하다.

좋은 답을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는 사람.

언젠가 아이가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 길이 부모의 기대보다 자신의 경험과 의지에서 출발한 것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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