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까지 한국인일까

22화

by명형인

청첩장 사건 이후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이 잦아졌다. 그도 그럴 게 오빠랑 많이 부딪히다 보니 서로가 너무 뻔히 보였다. 열심히 긁어낸 자리에 성향이나 가치관이라 하기 어려운 미묘한 불편함은 어느새 검붉은 딱지처럼 굳어졌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이렇게 하면 된다, 하면 안 된다는 말을 적극적으로 따르려 했다. 세상은 예스 피플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지, 사람들은 오히려 내 흠과 단점을 들춰내는 데 재미를 붙인 어린아이처럼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오히려 질질 끌려다니는 신세였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빠, 이래서는 안 돼! 한국이니까 한국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건 전혀 좋은 생각이 아니야.”


“네가 힘들어하니 내가 마음이 안 좋아. 열심히 해서 미국으로 이민 가자.”


“미국으로 가는 게 완벽한 해결바카라이 될 순 없어. 내가 겪어봐서 알아.”


“아니, 왜?”


오빠도 이 불쾌한 골짜기를 못 견뎌했다.
이 무렵 오빠는 여자 친구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안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꾸 나를 다그치게 되어 속상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부부가 될 사람은 역시 서로 닮아가나 보다. “나는 어디까지가 한국인일까?”라는 생각은 거의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매일 밤 나를 괴롭혔다.


내가 미국으로 갔을 땐 낯선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사람들이 내 영어를 독특하게 여겨 귀엽게 생각했지만, 으레 한국계 미국인들이 그러하듯이 모국과 자라온 나라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알아주진 못했다.


한국에서도 나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종종 들었다. 이건 어쩌면 두 나라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대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들다는 이유로 도피할 순 없었다.


그래서 오빠가 미국으로 이민 가자는 말을 꺼낼 때마다 그를 막아세웠다.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삶부터 생각하자. 서로 좀 흐린 눈을 하며 관대하게 바라보면 괜찮지 않을까?”


사실, 설득은 참 쉽지 않았다.


“눈치가 보이는데 어떡하라는 거야? 나도 그냥 넘어가고 싶은데 자꾸 신경 쓰여. 그래서 자꾸 바로잡아 주고 고쳐주고 싶고 그래.”


“오빠, 그거 오지랖이라고 부른대. 중국 사람은 빨간색을 좋아하고, 한국 사람들은 딱히 신경 안 쓰지만 무채색을 선호하는 편이고, 일본 사람들은 출근할 때 까만 가방을 들고 검은 양복을 입잖아? 그거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절대 못 고쳐. 결혼해도 대부분 배우자의 그런 건 안 건드린대. 생활 방식도 마찬가지일걸?”


“난 그게 더 이해가 안 돼. 그래도 한국이니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해.”


오빠랑 대화를 하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올 때가 많았다. 내가 제명에 못 살 게 분명했다.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면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사람은 검은 머리 외국인을 자기가 골라 놓고선 보이는 시선을 생각하라며 나를 재차 설득하였다.


누구에게도 딱히 위로를 얻을 수 없었던 내게 외할머니는 햇빛을 피해 쉴 수 있는 거대한 참나무 같은 존재였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어느 날은 외할머니에게 어리광 부리고 싶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극히 일부만을 일러바치듯이 말해 버렸다.


“할머니, 제가 어릴 때 미국에서 자랐잖아요? 한국에 돌아오니 사람들이 한국에 적응해야 한다고 다들 그러니까 힘들어요.”


“아이고, 한국에 왔으니 사람들 말 잘 듣고 그래야지!”


“맞아요. 저도 그걸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데 안 되니까 어려워요.”


“누가 뭐라 그러냐? 그냥 배우면 배우는 거고 잘 못하면 부족한 대로 살아가는 거지. 너 엄마 말 잘 들어야 혀.”


“알았어요. 할머니. 근데 할머니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느라 힘든 적 없었어요?”


“당연히 있었지. 나 때는 국민학교를 안 다니고 보통학교를 다녔던 말여. 조선말을 못 하고 일본말을 강제로 쓰니 답답했어.”


“보통학교가 뭐예요? 초등학교 같은 거예요? 국민학교는 아는데…”


“네 엄마 때가 국민학교였지, 나 때는 보통학교였어.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쳐들어와서 그렇게 부르라 했여.”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시대에 자라신 거예요? 몰랐어요. 전 할머니가 조선 시대부터 사신 줄 알았어요.”


“조선 시대는 나 말고 그 느그, 너 할아버지의 엄마여. 증조할머니 살아 계실 적 기억하지? 조선 시대 사람이었어. 난 아니야.”


할머니의 이야기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는데 엄마가 한 번도 언급 안 한 것들이라 충격적이었다. 내가 모르는 소녀 시절의 할머니의 삶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살아온 시대는 역사 시간에 배운 것보다 훨씬 더 숨 막히고 선명했을 텐데 말이다. 아픈 상처를 감히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가도, 내 머릿속에서 요동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조심스레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할머니에게 찔러 넣었다.


“할머니, 일제강점기 때 어떻게 버티셨어요? 본래 언어를 억지로 쓰지 못하게 했잖아요. 지금은 어떻게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세요?”


“당연히 몰래 했지. 안 보이는 곳에서 몰래 하면서 지켜냈어. 내가 한국 사람인데 어떻게 일본 문화를 그대로 따르냐? 갑갑하지.”


“진짜 무서우셨을 것 같아요. 할머니. 역사바카라을 보니 진짜 만만치 않은데요.”


“사람은 죽음이 코앞에 와도 다 하게 되어 있어. 내가 일본인이 아닌데 어떻게 일본 사람들을 따라 해. 부모님도 한국인이고 나도 한국의 것이 매우 익숙한데 당연하지.”


“그럼 할머니는 미국에 가면 힘드시겠네요?”


“당연하지. 이눔아! 난 영어를 모른단 말여. 미국은 생전 처음 가 보는 나라다.”


거침없이 솔직한 외할머니의 입담은 무시무시하고 무거운 주제도 웃음으로 날리는 재주가 있었다. 미국에서 절대 못 살 것 같다는 말에 폭소가 터졌다. 어이가 없게도 너무나 맞는 말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미국에 가면 아마 말도 안 통하고 사람 사는 방식이 극과 극이라 펄펄 성내며 거리를 누빌 것 같았다.


나와 외할머니는 서로를 보듬어 주었다. 시대도 상황도 달랐지만, 자신의 것을 감추며 살아야 하는 답답함만큼은 서로 통했다.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있는 용기마저 쥐어짜며 살아야 했다. 그래야 살아졌다.
할머니는 이제 숨통이 트인 지 50년도 훨씬 지난 일일 텐데 나는 아직이었다. 그래서 몹시 부러웠다.


그때부터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담을 수 있는 언어를 찾아 헤매었다. 대학에서 들었던 민족학 수업의 기억을 더듬으며 흩어진 조각들을 맞추다가, 문득 ‘norm’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영어로 놈이라고 발음하는 게 참 웃기기도 하지. 개인적으로 이놈 저놈 할 때의 ‘놈’으로 들려서 어감이 매우 마음에 드는 영어 단어이긴 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믿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다.


우리가 흔히 문화 차이나 문화 충돌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놈’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문화 차이를 잘 모르는 건지, 나와 오빠 앞에서는 ‘너네들이 겪고 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도 누구나 전부 다 겪는 거’라고 단정 짓는 경우가 많아 문제였다.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 눈에는 낯선 무언가가 눈에 밟히는 모양일지도 모른다. 항상 보던 친구들만 보다가 갑자기 이상한 머리 색깔을 한 친구 한 명이 불쑥 나타나면 괜히 그 애를 걸어 넘어뜨리고 싶거나 숙덕숙덕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그런 걸까.


내 예비 남편은 나에게 자꾸 한국에 왔으니 한국 문화를 따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가장 듣기 싫다.
나보다 연상이라는 이유로 오빠 행세를 하는 건지. 그이는 “한국에 왔으니 한국 문화를 따라라”라는 말 이외에도 “마침내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구나”가 입천장에 아주 붙어 있었다. 오빠는 나름 칭찬을 한 것 같은데 나는 지긋지긋했다.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교포 2세 또는 어릴 때 미국에 갔다가 성인이 되어 돌아온 유학생뿐이었다. 말이야 유학생이지 사고방식은 미국인이나 다름없는 친구들이긴 하다. 오빠는 그들을 어려워했다.


“그 친구들을 보니 너랑 완전히 똑같아서 놀랐어.”


“오빠, 내가 그 친구들과 똑같을 순 없어. 미국에서 살다 왔으니 비슷한 부분이 많은 거겠지.”


“내 눈에는 똑같아 보여. 네가 한 대여섯 명이 있는 것 같았다니까?”


이건 겪어 본 사람들만이 안다. 그때부터 내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문화가 다른 점을 부정하며 성격 차이일 뿐이라는 어설픈 조언을 건네는 사람들은 우리 커플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휘두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다 싸우니 참으라는 거다.


‘이건 문화 차이가 아니라 남녀가 달라서 그런 것이고 성격도 다르다 보니 말이 안 통하는 거죠. 저도 당신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굳이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세요. 내버려 두면 알아서 해결돼요.’


‘아니, 그러다 우리가 이혼하면 바카라임지실 거예요?’


‘당연히 아니죠? 제 일이 아닌데요.’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 침을 뱉을 순 없었다.
우리는 그걸 증정품을 받듯 무덤덤하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정중히 답하는 게 최선이었다.


나와 오빠는 웃어야 할지 찡그려야 할지 모른 채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이해할 때까지 계속 말하는 건 생각을 억지로 주입시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런 비인도적인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오빠는 내 편이었다.


어느 날, 동일한 문제점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연락이 닿기 시작했다. 역시 가뭄이 있으면 지하수도 있는 법이다. 열심히 파니까 뭐가 보였다.


우리처럼 같은 한국 사람인데도 다른 나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과 쭉 한국에서 자라온 사람으로 이루어진 커플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우리에게 미리 경고를 하듯 먼저 결혼하고 이혼한 부부도 있었고, 아예 청첩장을 백지로 만든 사람들도 있었다.


마음속에 철퇴를 숨기며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커플도 있었다. 툭하면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올 기세였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절대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각자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학습하는 게 답이다.”


말이야 쉽지 실전은 어려운 과제였다. 특히 예비 남편은 영어 울렁증이 심해 미국 문화를 배우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오빠는 내가 한국말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냥 내가 희생하면 된다고 여겼다. 이미 결혼한 선배님들은 결사반대를 하기 시작했다.


“너 남편 될 사람인데 영어를 배워야지! 그럼 너를 왜 만나니? 그거 자살행위야. 다문화 부부 생활의 어려운 점을 아직 못 느껴서 그래.”


묘하게 잊기 어려운 이 불길한 경고를 어찌해야 할까?
그냥 참고 사는 게 맞는 걸까? 내가 가진 문화를 전부 다 지우고 한국인으로 개조하는 게 맞는 걸까? 오빠도 내 문화를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내가 어디까지 한국인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미국인과 한국인 그 사이에서 떠도는 기분이 들었다. 이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바다 건너에 있는 언니와 긴 문자를 주고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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