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들어와 사는 남의 눈
아침. 그 여자는 거울 앞에 선다.
세수를 하고 무심코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오늘은 눈이 한 군데 멈춘다. 눈가다. 언제 이렇게 잔주름이 늘었을까. 어제까지 안 보이던 것이 오늘은 그것만 보인다. 입가가 처졌고, 볼에 그늘이 졌다. 방금 전까지 그냥 자기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고쳐야 할 데투성이다.
그 여자는 젊을 때 사진을 떠올린다. 그때는 예쁘다는 말도 들었는데, 정작 자기가 예쁜 줄 몰랐다. 늘 어딘가 부족하다고 여겼다. 지금 그 사진을 보면, 그렇게 좋은 얼굴을 왜 그때는 미워했을까 싶다. 그렇다면 지금 이 얼굴도, 십 년 뒤에 보면 그리운 얼굴이 아닐까. 그런데도 눈은 자꾸 주름으로 돌아간다.
얼마 뒤, 그 여자는 처음으로 시술을 받았다.
거울 속 얼굴은 잠시 괜찮아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도 덜 두려웠다. 그러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눈가가 펴지자 처진 입가가 보였고, 입가를 고치자 볼의 그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를 지울 때마다 다른 흠이 생겼다. 얼굴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흠을 찾아내는 눈이 더 날카로워진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가자. 얼굴을 가꾸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다. 매만지는 즐거움, 곱게 보이고 싶은 바람, 나이 들어도 단정하고 싶은 마음. 화장을 하든 시술을 받든,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가꾸는 것이 삶의 한 부분으로 있을 때, 그것은 삶을 돕는 즐거움이다.
선은 그 부분이 전부가 될 때 넘어간다. 외모가 삶을 위한 것이던 자리에서, 삶이 외모를 위한 것으로 뒤집힐 때. 하나를 고치면 다음이 보이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을 때. 그때 가꾸기는 중독이 된다. 예뻐지려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지우려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데 불안이 도리어 더 커지는 자리다.
그 여자가 지금 선 자리가 그 선의 어디쯤인지 들여다본다.
그 여자는 정말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을 보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주름이 흠이라고 누가 먼저 정해 놓았고, 그 여자는 그 기준을 빌려와 자기 얼굴에 대고 있을 뿐이다.
정신분석가 라캉은, 자아가 처음부터 내 안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아이는 거울 속 바깥의 이미지를 '나'라고 받아들이며 자기를 만들어 간다. 우리는 처음부터 외부의 이미지를 빌려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그 거울 자리에는, 타인의 평가와 슬롯의 기준이 들어선다.
그러니 거울 앞의 그 여자는 얼굴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얼굴을 바라볼 남들의 눈까지 함께 보고 있다.
여기에 첫 번째 겹이 있다. 그 여자는 예뻐지고 싶은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남 앞에서 부족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왜 그토록 남의 눈이 무서워졌을까. 여기 더 깊은 겹이 있다.
사람은 눈에 먼저 보이는 것에 끌린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답게 보는 일은, 그 첫인상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것이다. 저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무엇을 견뎌 왔는지 보는 것. 겉에서 멈추지 않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란 눈이다.
그러니 겉만으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눈은, 사람의 깊이를 아직 배우지 못한 눈이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미성숙이다. 남의 아픈 얼굴을 밀어내는 눈과, 자기 주름을 미워하는 눈은 그 점에서 닮아 있다. 둘 다 얼굴에서 멈추고, 그 얼굴이 살아온 시간까지는 보지 못한다.
이것이 두 번째 겹이다. 그 여자가 자기 얼굴을 미워하는 것은, 얼굴에서 멈추는 눈으로 자기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얼굴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얼굴은 나를 나이게 하는 단 하나의 표식이고, 내가 살아온 시간이 새겨지는 자리다. 눈가의 주름은 그 여자가 웃어 온 자리이고, 입가의 그늘은 그 여자가 견뎌 온 자리다. 그 얼굴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시간을 미워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