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성형 중독 2

돋보이려다, 서로 똑같아진다.

by응시

앞 글에서 우리는, 자기 얼굴을 미워하는 그 눈이 실은 얼굴에서 멈추는 눈임을 보았다. 그렇다면 그 눈은 누가 심어 놓았을까.


한 걸음 물러서서, 그 눈을 심은 손을 본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하나가 아니었다. 시대마다 달랐다. 통통한 얼굴이 복스럽다던 때가 있었고, 마른 얼굴이 세련되다던 때가 있었다.


한 시대 안에서도 사람마다 달랐다. 누구는 눈웃음에 마음이 가고, 누구는 웃을 때 지는 주름이 좋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어떤 기준에도 걸리지 않았다. 저마다 다르게 볼 여지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은 그 사람다움과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얼굴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실은 그 사람만의 무엇을 보고 있다. 웃는 모양, 눈매의 기울기, 말할 때 생기는 주름. 규격에 들어맞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그 여럿이 하나로 좁아졌다. 누가 작정하고 없앤 것은 아니다. 팔기 좋은 얼굴이 자꾸 보이고, 자꾸 보이는 얼굴이 기준이 되고, 그 기준에 맞춘 얼굴이 다시 팔리는 사이에 좁아졌다. 기준은 단순하고 분명할수록 전달하기 쉽고, 사람을 그 기준 안에 줄 세우기도 쉬웠다.


잣대가 하나가 되는 순간, 나머지 모든 얼굴은 미달이 된다. 예전에는 그냥 다른 얼굴이던 것이 이제는 모자란 얼굴이 된다.


그러면 불안이 자란다. 내 눈으로 나를 보던 자리가 무너지고, 남이 정한 기준으로 나를 재기 시작한다. 시장은 주름을 시간에서 결함으로 번역하고, 사람은 그 번역을 받아들여 자기 얼굴을 다시 읽는다. 웃어 온 자리가 고쳐야 할 자리로 보인다.


사람의 얼굴에서 살아온 시간과 표정을 지우고, 눈과 코와 턱을 따로 떼어 등급을 매기는 순간 인간은 상품에 가까워진다. 외모지상주의란 사람이 사람을 물건처럼 평가하는 그 자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 기준을 실어 나르는 것은 화면이다.


드라마에서, 광고에서, 손 안의 기기에서 비슷한 얼굴이 하루에도 수십 번 지나간다.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눈앞에 반복될 뿐이다. 반복해서 본 얼굴은 어느새 익숙한 얼굴이 되고, 익숙한 얼굴은 아름다운 얼굴처럼 느껴진다.


화면은 견본까지 내준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기준을 들고 병원에 가지 않는다. 사진을 들고 간다. 이 배우처럼, 저 얼굴처럼.


수많은 사람이 몇십 명의 얼굴을 나누어 가지려 하니 서로 닮아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그 견본조차 조명과 각도와 보정을 거친 것이다. 실물로는 어디에도 없는 얼굴이다. 그 배우 자신도 화면 속 자기 얼굴과 다르다.


그렇게 만들어진 얼굴이 다시 화면에 오른다. 그러면 기준은 한 칸 더 좁아진다. 어제까지 괜찮았던 얼굴이 오늘은 모자라게 되고, 사람들은 다시 병원으로 간다.


여기서 앞 글의 그 여자와 만난다. 그 여자는 거울 앞에서 새로운 흠을 찾아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흠은 그 여자가 발견한 것이 아니다. 세상이 새로 만들어 건넨 것이다.


한 칸 따라가면 기준은 다시 한 칸 올라간다. 그래서 아무리 고쳐도 끝나지 않는다.


그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얼굴들이 서로 닮아간다. 같은 코, 같은 턱선, 같은 눈매. 사람들은 돋보이려고 얼굴을 고치는데, 다들 같은 기준으로 고치니 결과는 정반대다.


돋보이려다 서로 똑같아진다.


이것은 뜻밖의 결과가 아니다. 아름다움이 그 사람다움에서 나온다면, 그 사람다움을 지울수록 아름다움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뻐지려고 고칠수록 오히려 덜 아름다워진다.


하나의 규격에 자신을 맞출수록 얼굴에서 그 사람만의 흔적이 지워진다. 나를 드러내려고 고친 얼굴이 남과 구별되지 않는 얼굴이 된다. 얼굴을 고칠수록 ‘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수만 개의 얼굴이 몇 개의 규격으로 줄어든 세상. 그것은 단지 단조로운 세상이 아니다. 저마다 하나뿐이던 사람들이 지워진 세상이다.


그러니 혹시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의 흠만 보인 적이 있다면, 자신을 탓하지 말기를 바란다. 자기 얼굴을 미워하게 된 것은 자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나로 좁혀진 잣대를 사방에서 건네받았을 뿐이다.


그 잣대를 잠시 내려놓고, 흠이 아니라 그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기를 바란다. 그 얼굴이 무엇을 견뎌 왔는지, 얼마나 웃었는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거울은 얼굴을 심판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사람을 다시 만나는 곳이어도 된다. 남이 정한 규격 대신 그 얼굴에서 자신만이 아는 시간을 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처음 받아 주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어쩌면 아름다움은 거기서 다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