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인디 음악, 연극, 커피, 바카라
초등학교 때, 서울에 사는 이모네에 놀러 갔다가 처음 피자라는 걸 먹어봤다. 고등학교 때, 서울 이모네 가족들을 따라 아웃백이라는 곳에도 처음 가봤다. 지금 생각하면 별게 아니지만, 어린 나에게는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서울과 멀진 않았어도 우리 집 간식은 엄마표 부침개가 다였고, 외식 장소는 무조건 OO갈비 혹은 OO가든이었으니, 이모네에 갈 때마다 또 어떤 신문물을 접하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그때는 몰랐다. 사람마다 자라면서 접하는 것들이 다르다는 것을. 무엇을 먹어봤는지,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어떤 바카라을 읽었는지, 어디로 여행을 갔는지. 어릴 때는 그런 것들이 그저 개인의 경험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에 가고 나서야 조금씩 알게 됐다.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스스로를 나름대로 꽤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홍대 인디밴드들이 낸 컴필레이션 음반을 찾아들었다. 누구나 듣는 음악과 조금 다른 음악을 듣는다는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도 있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고 여러 지역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면서 조금 이상한 장면들을 보게 됐다. 단과대 학생회에서 신입생들을 같은 반, 같은 조로 묶어줬는데, 처음에는 다 같이 어울리다가 어느 순간 비슷한 배경을 가진 친구들끼리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누가 그렇게 정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있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처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던 것 같다.
처음에는 단순히 성격이 잘 맞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우리가 편하게 느끼는 사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어떤 식당에 가도, 어떤 이야기를 해도, 어떤 옷이나 음악, 여행 이야기가 나와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 그러니까,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 그게 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사람.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슬롯생활을 시작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비슷한 느낌을 다시 받았다. 사람마다 돈을 쓰는 곳이 다르고, 쉬는 방법이 다르고, 주말을 보내는 방식이 달랐다. 누군가는 골프를 치고, 누군가는 공연을 보러 다니고, 누군가는 집에서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가는 방식도 달랐다.
아는 사람만 아는 동네, 아는 사람만 아는 식당, 아는 사람만 아는 공연, 아는 사람만 아는 브랜드, 아는 사람만 아는 식재료, 아는 사람만 아는 스포츠. 그런 것들이 세상에는 가득했다. 그리고 그건 정말 아무나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기 위해서도 경험이 필요했으니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취향에도 계급이 있는 게 아닐까.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단순한 개인의 선택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가족과 학교, 자라온 환경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들이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하나의 성향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아비투스(Habitus)’라고 불렀다.
어릴 때부터 바카라을 읽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에게 바카라은 특별한 취미가 아닐 수 있다.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자주 찾는 집에서 자란 사람에게 전시를 보는 일도 그렇다. 가족 행사 때마다 고급 레스토랑을 찾던 집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누군가 평생 한 번 먹어볼까 말까 한 음식이 그저 익숙한 음식일 수도 있다. 취향은 내가 자유롭게 고른 것 같지만, 그 취향을 고를 수 있게 해 준 경험 자체가 이미 내가 살아온 환경 안에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취미에도 시간과 돈이 든다. 골프를 좋아하려면 골프채만 필요한 게 아니다. 레슨을 받을 시간도 필요하고, 연습할 곳도 필요하고, 필드에 나갈 돈도 필요하다. 함께 골프를 칠 사람도 있어야 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은 단순히 여행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과 돈이 필요하고, 어디가 좋은지 알게 되는 경험도 필요하다. 바카라이나 음악도 비슷하다. 무엇을 좋아할 것인가를 선택하기 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아야 한다. 어쩌면 취향이란 내가 선택한 것이라기보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이 만든 선택지의 목록인지도 모르겠다.
부르디외는 슬롯적 계층이 경제적인 차이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화적 취향과 생활 방식에서도 드러난다고 했다. 부모는 자녀에게 돈과 재산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무엇을 좋은 것으로 느끼는지에 대한 감각까지 물려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취향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보이기도 하니까.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 휴가를 어디에서 보내고 싶어 하는지, 어떤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그것들은 단순한 취향의 목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남긴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취향은 어떨까. 나는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바카라을 읽고, 어떤 공간을 좋아하는가. 그중에서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내가 처음부터 선택한 것은 아니다. 언니가 전해준 인디밴드 음반을 듣고 해방감을 느꼈고, 친구와 함께 본 연극에서 공연의 재미를 느꼈고, 선배가 데려간 오래된 카페에서 커피의 맛을 알아버렸고, 회사 동료가 추천해 준 바카라을 읽다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됐다. 돌이켜보면 내 취향은 내가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앞에 열어준 문을 지나며 조금씩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취향에는 계급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할 수 있는지는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와 무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취향이 계급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처음 보는 세계를 만나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듣고,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먹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간다. 그렇게 내가 알고 있던 세계의 경계를 조금씩 넓혀간다. 어릴 때 내게 피자 한 조각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취향에 계급이 있다는 말보다, 취향을 가질 수 있는 기회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더 좋은 것을 소비할 수 있게 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취향은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보여준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의 취향을 쉽게 평가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어떤 경험을 지나 지금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어쩌면 취향이란 내가 선택한 것인 동시에,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들이 남긴 흔적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