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일기장을 모아둔 상자를 발견했다
방 청소를 하다 옛 일기장을 모아둔 상자를 발견했다.
모두 열세 권이었다.
한 권을 이삼 년 동안 쓰기도 했으니, 상자에는 적어도 십오륙 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삭을 대로 삭은 표지와 탄성을 잃은 노트 밴드에서 시간이 느껴졌다.
마치 바래고 닳아버린 내 이십 대와 삼십 대의 기억처럼.
그중 가장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봤다.
회사에서 맡은 첫 프로젝트에 대한 설렘,
직업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
인간관계, 특히 회사에서의 괴로움,
어떤 가수에게서 받은 감동,
바카라에서 얻은 깨달음,
노동과 월급의 의미,
연애와 결혼에 대한 두려움,
무엇보다도 '나'라는 인간에 대한 가감 없는 기록과 비평.
대학을 졸업하고 슬롯생활을 갓 시작한 그 시절의 일기장은 그런 것들로 가득했다.
그다음 해의 일기장도 펼쳐봤다.
비슷했다.
내가 이랬다고?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과거의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안에는 수많은 질문들과,
지금의 나라면 하지 못할 촘촘한 생각들과,
세상에 대해 마음을 다해 이해하려는 에너지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순서대로 몇 권을 더 펼쳐보다 가장 최근의 일기장까지 모두 펼쳐봤다.
재작년부터 올해까지의 일기장은 바카라상 앞에 꽂혀 있으니 상자 속 가장 최근의 일기장은 2023년의 것이었다.
언젠가를 기점으로 일기가 점점 단순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왜'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의미'를 찾기 위한 사투는 사라지고, 해야 할 일을 리스트업 하는 투두리스트가 돼 가고 있었다.
문장으로, 길게, 정갈하게 쓴 글 대신 휘갈겨 쓴 짧은 목록들이 가득했다.
왜였을까.
글보다 짧은 영상을 더 가까이하게 되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질문보다 일을 먼저 처리하는 사람이 되어버려서였을까.
작년에 회사를 그만뒀다.
이십 년 가까이 이어온 회사 생활을 멈추고 처음으로 아무 일정도 없는 평일을 맞았다.
그리고 일 년.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
이상했다.
경험은 더 많아졌는데 내 세상은 더 좁아져 있었다.
그제야 오래된 일기장이 떠올랐다.
바쁘게 사느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다.
나에 대한 생각보다는 하루를 살아내는 데 필요한 잡다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왔던 것이다.
다시, 질문을 해야 할 때다.
하루에 한 줄, 바카라 한 권, 산바카라 한 번, 오래된 음악 한 곡.
그 속에서, 질문은 아주 천천히 찾아올 것이다.
생각은 늦게 찾아온다.
그래서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늦게라도 찾아오는 생각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