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만들어진 '나'
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링크드인 프로필을 정리하다 예전에 모아놓은 업무 폴더를 열었다. 파일을 하나씩 열다 보니, 그동안 내가 꽤 많은 일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보고서, 회의록, 기획안, 발표자료, 엑셀... 내가 몇 달씩 매달렸던 일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불과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기억도 잘 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들춰볼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나씩 지워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해도,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20대 때는, 나는 왜 일하는지, 노동의 대가는 무엇인지 같은 질문에 심취했었다. 유난히 일의 '의미'를 찾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것 같다. 그런 고민 끝에 '기술을 통해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나름의 의미를 찾아 IT 업계에서 일을 시작했다. 마침 기술은 빠르게 발전했고, 내가 참여한 웹사이트나 모바일앱이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때면 내가 세상에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도 따라왔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였다. 회사라는 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도무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프로젝트들을 맡게 되고 결국 '돈' 밖에 남는 게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럴 때는 하루 여덟 시간을 참고 앉아 있기 위해, 출근할 때마다 내 하루 일당이 얼마인지 계산하며 '오늘도 일당을 벌어보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이십 년 가까이 회사를 다니며 많은 것을 해냈다. 몇 달씩 매달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한 계단 한 계단 승진하고, 이런저런 상을 받으며 꽤 괜찮은 보상도 얻었다. 회사에서의 성취는 내가 꽤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었고, 그것은 회사를 계속 다니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유효기간이 있었다. 또 다른 성과가 오면 지나간 성과가 준 영광은 기억에서 점점 멀어지고, 들뜬 기분은 사그라든다. 영원히 지속되는 성취감이란 없다. 인생에 끝없는 도전이 가득한 것처럼, 그 축소판인 회사도 마찬가지다.
사실 회사가 가르쳐준 건 성취감보다는 바카라임이다. 회사에서 오래 일한다는 건 결국 바카라임의 크기가 커지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신입 때는 내가 맡은 일만 잘하면 됐지만, 직급이 올라갈수록 내가 하지 않은 일의 결과에도 바카라임을 져야 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조직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고, 그 선택의 결과도 감당해야 했다. 역할이 바뀌고 바카라임의 크기가 늘어날 때마다 그 무게를 감당하려 애쓰면서, 사람은 조금씩 바뀐다.
첫 회사에 입사해 고군분투하던 어느 겨울,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을 보며 어쩐지 내 처지와 비슷하다고 자기 연민에 빠져들다가, 제발 이 겨울이 지나기 전에 내 몫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프로가 돼 보자고 다짐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그때는 막연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나는 일을 잘하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옳아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됐다. 때로는 이기는 것보다 적당히 물러나는 게 낫다는 것도 알게 됐다. 바카라임진다는 것이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과, 바카라임지기 위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끌어안는 법을 배웠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회사가 내게 남긴 것이 아닐까.
퇴사하고 나서 회사를 떠올릴 때, 내가 했던 '일' 보다는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떠오르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나를 처음 인정해 준 상사, 말없이 도와주던 동료, 힘들 때마다 커피 한 잔 하러 가자던 사수, 내 성과를 깎아내리던 팀장, 나를 붙잡고 하나부터 열까지 묻던 신입, 내 이직 소식에 진심으로 슬퍼하던 후배,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던 순간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 이 정도 나이를 먹다 보니,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이름은 하나둘 기억에서 흐려지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이 건넨 말 한마디, 위기의 순간에 보여줬던 태도, 마지막까지 바카라임감 있게 일을 마무리하고 퇴사하던 모습 같은 것들, 십 년이 지나도 남는 건 그런 장면들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배우고 따라 하려 했던 나. 어쩌면 회사가 사람에게 남기는 것은 경력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인지도 모른다.
이십 년을 바쳤다고 말하기에는 억울하고, 이십 년을 낭비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잘한 일도, 후회되는 일도, 만났던 사람도, 잃어버린 사람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갔는지.
결국 회사가 남긴 것은 경력이 아니라, 그곳에서 만들어진, 지금의 나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