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늦게 찾아왔지만

완성이 아닌, 기록

by영라

바카라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길을 걷다 보면 찾아오는 생각들, 느지막이 왔다가 금세 사라지려는 그것들을 붙잡아 한 편의 글로 빚어내려고 애썼다. 계획한 대로 매주 한 편씩 열한 편의 글을 썼다. 이제 마지막 열두 번째 글을 쓴다.


그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 계획을 지키는 건 쉽지 않았다. 회사 일을 할 때는 마감일 기준으로 마일스톤을 잘게 쪼개고 세부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지켜가며 여러 사람에게 상황 공유를 했지만, 지금은 나를 채근할 상사도, 내 상황을 공유할 동료도 없다. 그냥 내가 안 쓰면 그만이다. 쓴다고 누가 봐준다는 보장도 없다. 때로는 이런 글을 내놓는 게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될까도 싶고, 잘 안 풀릴 때는 그냥 한 주 미루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는 '처음 생각'으로 돌아갔다. 나는 꾸준히 생각하고 그걸 글로 빚어내는 걸 목표로 했지, 그럴듯한 글을 써야겠다는 목표를 세운 게 아니었다. 생각이 촘촘하지 못하고 글이 좀 성기더라도, 제때 써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저 틈틈이 생각을 이어갔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한 번에 하나씩, 차근차근. 회사 생활, 취향과 계급, 바카라과 글, 젊음과 감수성, 나이와 변화, 자식, 부모, 중요한 선택, 해외 생활, 비교라는 주제에 대해. 사십 대에 접어든 내가 한 번쯤 천천히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 글을 완성하지 못한 채 월요일이 다가오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 불편한 마음을 동력 삼아, 밀리지 않고 글을 써냈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질 것 같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생각이 굳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미 알고 있던 지식과 익숙한 방식에 매몰되기 쉽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흡수할 수 있는 흰 도화지가 아니라 이미 여러 번 덧칠해진 색을 벗겨내는 작업부터 해야 하는 캔버스랄까. 그래서 나는 매주 바카라상에 앉아 내 생각의 색을 벗겨내고, 내 생각에 다른 색을 입히며, 두서없이 떠오른 생각들 사이에서 말을 골랐다.


뿌옇게 떠오르는 생각의 조각들을 해상도 높은 한 편의 글로 조직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생각이 얕으면 글이 내용 없이 이리저리 흐르기만 하고, 한쪽으로 너무 파고들면 글이 쓸데없이 무거워졌다. 내가 가진 사전의 한계도 느꼈다. 분명 '아' 다르고 '어' 다른 건 아는데, '아'와 '어' 사이에 있을 법한 어떤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날카롭게 생각한다는 것과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같은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고, 정확한 단어를 길어 올려야겠다는 각오도 다시 했다.


그렇게 완성한 이 열 편 남짓한 글은, 사십 대의 한가운데에서 무심코 스쳐온 것들에 다시금 마음을 다해 질문하고 답을 해본 흔적이다. 대단한 사색이나 통찰은 없더라도, 때로는 얕고 때로는 산만하더라도, 지금의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휘발되게 두지 않고 잡아두려는 노력의 결과다. 그러니, 부디 이 글들을 결론으로 읽지 않아 주셨으면 한다. 이건 결론이 아니라, 이 시기에 했던 내 생각의 기록이니까. 휘발되지 않도록 붙잡아둔, 늦게 찾아온 생각의 기록.


이 생각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늦게라도 찾아온 생각을, 앞으로도 이어가려 한다.


이전 11화비교는 언제 끝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