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봐지다'에서 '돌보다'로

부모의 늙음을 마주하는 나이가 되었다

by영라

아이가 열 살이 넘어가니 확실히 예전보다 손이 덜 간다. 돌봄에 쓰던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드니 그만큼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어쩐지, 그 여유를 온전히 나에게 쓰지 못하고 있다. 돌보는 것에도 관성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내게 또 다른 돌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부쩍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한다. 아직 건강하시긴 해도 연세가 팔순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 살다 보니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정도 부모님을 뵙는다. 한국에 갈 때마다 비행기 안에서 늘, 곧 만날 부모님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부디 지난번 뵀을 때보다 더 늙지 않았기를, 더 약해지지 않았기를 빌면서. 하지만 언제나 조금 더 작고 희미해진 부모님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앞으로 부모님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아이가 성인이 되면 한국에 돌아가서 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러려면 아직도 7-8년은 더 남았다.

지금 부모님 연세에 7-8년을 더하면...... 두려워진다.


우선은, 한국에서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거기에 더해 같이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고, 풍경 좋은 곳을 구경하고,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주말 농장을 함께할 수 있으면 참 좋으리라. 하지만 부모님의 연세를 생각하면 이 모든 건 굉장한 '행운'을 필요로 하는 일일 수 있다. 어쩌면 나에게는 늙은 부모님을 돌보는 시간만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와 부모님 사이에는 돌보고 돌봄을 받는 일만 남을 수도 있다.


문득,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두 분은 작은 마당이 있는 시골집에서 평생을 사시다가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면서 우리 집으로 오셨다. 자식의 돌봄을 받으며 병원을 다녀야 했으니 다른 선택지를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익숙한 동네, 친근한 이웃들, 편안한 내 집을 떠나 도시의 아파트로, 돌봐줄 자식의 집으로 가는 그분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산 아래, 탁 트인 마당이 있는 집에 살다, 꽉 막힌 도시의 아파트 방 한편을 차지하게 됐을 때, 어떤 마음이셨을까. 옆집, 뒷집, 앞집, 길만 나서면 아는 사람 천지인 고향 마을에 있다가 자식 외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동네로 왔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몇 년 후, 집에서 돌보는 게 점점 어려워지면서 두 분은 결국 요양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두 분의 마지막에 대해 생각한다. 자유를 잃고, 익숙한 공간을 잃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잃어가면서 보내는 마지막. 그때의 두 분을 생각하면, 노년의 끝에는 어쩌면 그런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게 되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시간.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내가 결정할 수 없게 되는 시간.


다시 부모님을 생각한다. 나는 부모님의 삶을, 특히 마지막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존엄하게, 이왕이면 행복하실 수 있게, 돌보고 싶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는 마음 한 편에서는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나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 부모님을 돌보는 데 집중할 수 있을까.


다시, 내가 아이일 때 나를 돌봤을 부모님을 떠올린다. 나도 아이를 키워 봤으니 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정말 많은 희생이 필요한 일이다. 아이는 부모의 살과 뼈, 시간과 노력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부모가 되면서, 세상의 중심은 '나'에서 '아이'로 옮겨간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이 아이를 중심으로 다시 배치된다. 여기엔 헌신이 따른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동안은 그게 특별한 희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부모님도 나를 그렇게 키웠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순간에 부모님은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걱정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내가 아프면 밤새 곁을 지켰을 것이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것이고, 내가 잘 자고 있는지 몇 번씩 들여다봤을 것이다. 그 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내 아이에게 했듯, 분명 부모님도 나에게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를 그렇게 돌봐준 부모님을, 나는 과연 그렇게 돌볼 수 있을까.


사십 대가 되고, 부모님이 여든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어떤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일 년에 한두 번 한국에 갈 때마다, 부모님의 늙음을 마주할 때마다, 시간이 등뒤에서 나를 바짝 따라와 그 순간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 내 부모를 돌보는 사람이 되는 순간을. 돌봐지던 사람이 돌보는 사람이 되는 순간을.


연세에 비해 부모님은 건강하신 편이지만, 그 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때까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국에 좀 더 자주 가는 것. 갔을 때 좀 더 오래 함께 하는 것. 여행을 가고 맛있는 걸 먹고 함께 하는 추억을 만드는 것. 그리고, 평소에 더 자주 연락하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건네는 것. 이런 평범한 것들이 언젠가는 가장 그리운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언젠가 올 그 순간을 준비한다.


아직은 부모님이 건강하시다. 나보다 앞서 걸어가는 부모님 뒤에서 아직은 내가 돌봄을 받던 사람으로 있을 수 있다. 그 시간이 조금만 더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돌봐지던 사람이 돌보는 사람이 되는 그 순간이, 아직은 조금 더 멀리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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