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정답을 고르는 일이 아니었다

선택을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

by영라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한다. 당장의 점심 메뉴부터, 몇 번 버스를 탈 것인지, 장을 어디서 볼 것인지 같은 사소한 것들도 선택의 연속이다. 그보다 조금 더 큰 선택들도 있다. 어느 학교를 갈지, 어떤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한다면 누구와 할 것이며, 아이를 낳을 것인지, 어디서 살 것인지, 회사를 계속 다닐 것인지 같은, 그 영향 범위가 더 큰 선택들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 있는 선택(Choice)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


선택을 할 때마다 우리는 정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어릴 때는 선택 하나가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 가장 안전한 선택, 남들의 시선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선택을 하려고 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선택의 순간을 하나 꼽자면, 대학 전공을 선택하던 순간이다. 모 대학의 슬롯계열에 입학한 나는 법, 경영, 경제, 통계, 행정, 정치외교, 신문방송, 슬롯복지, 심리, 슬롯학 중 하나를 전공으로 선택해야 했는데, 끝까지 '법'과 '신문방송'을 놓고 고민하다 끝내 '법'을 클릭했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어릴 때부터 내가 법조인이 될 걸 바라고 계셨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고, 새롭고 흥미로워 보이던 분야를 선택할 용기는 부족했다. 조금 더 창의적인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지만, 그 당시엔 그런 마음을 외면하고 '법'을 선택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그 답은 틀린 답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법대를 졸업했지만 법조인이 되지 않았고, 대학원에 가 영상콘텐츠를 공부했고, IT 회사에서 오래도록 일했고, 지금은 회사를 나와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헌법, 민법, 형법, 상법, 소송법, 노동법 같은 과목을 듣고 결국 학사학위란 걸 땄지만 한 번도 법과 관련된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어찌 보면 그때 '법'을 클릭한 건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때 '신문방송'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했던 선택들을 떠올리며, '만약 그때...'라는 가정을 해본다. 만약 그때 바로 취업하지 않았다면? 만약 그때 IT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면? 만약 그때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 그때 싱가포르에 오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만약 그때....'라는 가정은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판단할 수 없고, 선택하지 않은 길에는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삶이 더 완벽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처음 남편이 싱가포르로 발령받았을 때, 우리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싱가포르행을 결정했다. 새로운 곳에서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두근거림 기저에는 '가서 몇 년 살아보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자'는 다소 나이브한 마음도 깔려 있었다. 한국에 남았다면 얻었을 것도 분명 있었고, 싱가포르에 왔기에 얻은 것도 분명 있었다.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이곳의 살인적인 물가에 허덕이고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칠 때마다, 한국에서 커리어를 이어갔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라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안 되는 영어로 꾸역꾸역 인터뷰를 보고 다시 온라인 게임을 갖고 일했던 시간, 아이가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어울리며 커가는 모습, 뜨거운 태양 아래 무성하게 자라나는 사시사철 푸르른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지금을 발견하면, 후회는 사라진다. 결국은, 싱가포르행을 선택한 이후, 이곳에서 보냈던 그 치열한 시간이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건 아닐까.


선택의 순간에는 선택의 끝을 알 수 없다. 우리는 목적지를 알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한 뒤에야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전공으로 법학을 선택했을 때는 이십 년 뒤 내가 작가가 되겠다며 다시 글을 쓰고 있을 줄 몰랐고, 싱가포르행을 선택했을 때는 내가 여기서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 몰랐고, 회사를 그만둘 때는 지금처럼 온라인카지노에 글을 쓰며 지난 삶을 돌아보고 있을 줄 몰랐으니까.

어릴 때는 좋은 선택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좋은 선택을 해도 일은 꼬일 수 있고, 별것 아닌 선택이 인생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반대로 당시에는 잘못된 선택처럼 보였던 일이 나중에는 내 삶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선택 자체보다 선택 이후에 무엇을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택은 한 번의 결정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수많은 작은 선택들의 시작이다.

여전히 나는 수많은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는 중이다. 회사를 그만둔 것, 글을 쓰기 시작한 것,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이 선택들이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정답을 따지기보다, 이 선택을 어떻게 살아낼지를 생각해 본다.


어쩌면 선택은 정답을 고르는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선택한 순간에는 그 길의 끝을 알 수 없으니까. 우리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걸으며 또 다른 선택을 한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정답을 찾아온 시간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선택을 감당하고 살아내며 그것을 내 삶으로 만들어온 시간이었다.


법을 선택했던 것도, 싱가포르에 왔던 것도, 회사를 그만둔 것도, 지금 다시 글을 쓰는 것도 그렇다. 그때의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때의 선택뿐이었다. 그 이후의 삶은, 그 선택을 한 내가 만들어가야 할 몫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대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이 선택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어쩌면 인생은 정답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내가 고른 답을 살아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전 08화'돌봐지다'에서 '돌보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