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앞에서 드러나는 밑천

이 마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by영라

최근 들어 아이와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내년이면 아이가 싱가포르의 초등학교 졸업시험인 PSLE를 치러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공부하라는 말을 자꾸 하게 된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아이는 딱 아이답게(!) 군다. 밖에 나가 농구를 하고, 수영을 하고, 축구 카드를 교환하고. 한마디로 놀 건 다 놀고, 잘 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학교 숙제를 하는 둥 마는 둥이다. 그러니 공부 이야기를 꺼내면 십중팔구 실랑이가 벌어진다.


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왜 공부를 잘해야 해?”

나는 준비해 둔 것처럼 대답했다.

“공부를 잘해야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잖아.”

“왜 좋은 학교에 가야 하는데?”

“그건…… 좋은 학교에 가면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말하고 나니 조금 이상하다. 좋은 학교에 가야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다니.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좋은 친구라는 뜻인가. 좋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뜻인가. 요즘 세상에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속으로 꼰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바로 그 꼰대가 나였다니.


아이의 질문은 계속됐다.

“그럼 왜 좋은 대학에 가야 해?”

이 질문에는 또 다른 대답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아직 네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잖아. 꿈이 뚜렷하면 그걸 따라가면 되는데, 아직 모르겠다면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많이 만들어놓는 게 좋지.”


이건 꽤 합리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잘한다고 인생이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공부를 잘하면 선택할 수 있는 학교나 직업의 범위가 넓어지고,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지니까. 아직까지는 이게 내가 겪은 현실이다.


더불어 재미있지 않더라도, 좋아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꾸준히 성실하게 해내는 경험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닥쳐올 수많은 재미없는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인내심과 성실함이야말로 그 사람의 진정한 힘이 될 테니.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는 말들이 마음에 걸린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꼭 공부를 잘하고 명문대를 나오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지 않아도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막상 내 아이 앞에서는 오락가락한다. 아이의 성적이 기대만큼 좋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정말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는 걸까.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자기 길을 찾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사실은 별로 없는 걸까. 아니면 혹시 아이를 나의 트로피처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는 아이를 앞세워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불편해진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기대가 자식의 인생을 얼마나 부담스럽게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부모님은 내가 법대에 가서 법조인이 되길 바라셨다. 나도 한때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못 이룬 꿈을 이루라느니, 법조인이 최고의 직업이라느니, 수년간 그런 말을 듣고 자랐으니 나도 그것이 내 꿈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생 무렵에 이미 생각이 달라졌다. 작가나 방송국 PD, 영화감독 같은 좀 더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움텄다. 하지만 차마 부모님께 국문과나 신문방송학과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결국 법대에 들어갔다. 법대를 졸업하고도 법조인이 되지는 못했다. 법조인이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 힘들다는 고시공부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대학원에 가서 영상콘텐츠를 다시 공부하고, IT 회사에 들어가 오랫동안 회사원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다시 글을 써보겠다고 고군분투 중이다. 돌고 돌아서 말이다. 참 멀리도 말이다.


결국 법대에 가기로 한 것도 나였고, 그 이후의 삶을 선택한 것도 나였으니 부모님이 내 인생을 대신 결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모의 기대라는 건, 부모가 직접 강요하지 않더라도 아이의 머릿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아이는 그것이 부모의 바람인지, 자신의 욕망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아이를 낳기 전부터 나는 미래의 내 아이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결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 엉뚱하거나 현실성이 없어 보여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직접 해보고, 그 결과도 자기가 바카라임지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조금 불안해 보이는 길이라고 해서 부모가 대신 안전한 길을 골라주고 싶지는 않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부모가 되고 싶다고.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아이가 커가면서 나는 이상한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얘가 의사나 과학자가 되면 어떨까.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서 전문직이 되고, 안정적인 삶을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고, 그런 아이를 둔 부모로서 나도 조금은 뿌듯했으면 좋겠다. 아이에게는 네가 원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원하는 삶의 모양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모라는 자리에 서면 이런 마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의 삶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이의 삶이 내가 생각하는 ‘잘된 삶’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주 가까이에 닿아 있다. 아이의 미래가 걱정돼서 좋은 학교에 가라고 말하는 것과, 좋은 학교에 간 아이를 둔 부모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 역시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입시의 전장으로 뛰어드는 아이를 보며 불안해지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내 욕망을 슬쩍 끼워 넣고 있는 걸까.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다. 자식 앞에서는 부모의 밑천이 드러난다는 것을.


아이에게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줘도 부모가 실제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아이는 귀신같이 안다. 공부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성적표 하나에 표정이 달라지고,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고 말하면서도 안정적인 직업을 은근슬쩍 들이밀고, 남들과 비교할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아이의 성취를 부러워한다면 아이는 내가 하는 말보다 내게서 본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부모가 해주는 말보다 부모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아이는 배운다.

그러니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부모님이 원했던 길을 따라갔다. 그렇게 돌고 돌아 이제야 내가 좋아했던 글쓰기라는 일을 다시 시작하는 중이다. 아이에게 꿈을 찾으라고 말하기 전에, 나부터 내 꿈을 살아보는 중이다. 꿈을 찾는 게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것. 한 번 돌아간 길에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삶과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대신 내 삶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아이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부모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좋은 학교에 가기를 바랄 수도 있고, 좋은 직업을 갖기를 바랄 수도 있다. 어쩌면 앞으로도 아이의 성적표를 보며 마음이 철렁할 것이다. 다만 그때마다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다.


이 마음은 누구의 것인가.

아이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아이의 인생에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나 얹어놓고 있는가.


자식 앞에서는 밑천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가진 밑천이 무엇인지는, 나부터 가끔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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