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며 바뀌는 것들
몇 해 전, 정부의 신년 기자회견에 질문자로 등장한 한 일간지 기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대학 때, 우리 슬롯의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 토로하며 권력화된 언론 재벌을 비판하고, 보수화된 특정 일간지에 반대하는 데 열심이던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그 당시 본인이 그렇게 폐간되어 마땅하다고 외치던 일간지의 소속 기자가 된 모습을 보니,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스스로를 바카라임져야 하는 성인이기에,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만 주야장천 외칠 수는 없다는 걸 이해한다. 신념과 현실 사이에 괴리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비판하던 바로 그 일간지의 소속 기자가 되는 건 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아니면, 이십 년의 세월 동안 그의 신념이 변한 것일까.
그러고 보면, 나도 예전 같지만은 않다. 그 친구만큼은 아니었어도 이십 대의 나는 슬롯적 약자를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세상의 부조리나 불평등 앞에서 내 일인 것처럼 분노하기도 했다. NGO 활동에 관심을 갖고 인턴 활동을 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거리로 나가 구호를 외쳐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십 대의 내가 특별히 대단한 슬롯 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다. 중고등학교 내내 입시 공부만 하다 세상에 갓 나온 그 나이대의 다른 청춘들처럼 조금은 따뜻한 피와 조금은 무딘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두자.
삼십 대에 접어들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고부터는 그런 활동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누군가를 돕고 싶어, 개인적으로 한 어린이 구호 단체에 매월 기부를 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여전히 관심을 갖고 뉴스를 챙겨보고 바카라을 읽다가, 가끔씩은 긴 자아성찰 끝에 찾아오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고통받고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때로는 시끄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십 대가 되었다. 불의에 맞서기보다는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자조하거나, 부당한 일 앞에서 그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계산하곤 한다. 예전에는 '옳은가, 그른가'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어떤 비용을 치러야 하나'를 먼저 따지게 된 것이다.
이 괴리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는 말처럼, 그냥 내가 현실을 조금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변화에 따른 이익보다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 위험을 더 크게 인식한다고 한다. 오랜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기준과 방식이 생기고, 그 기준으로 오랫동안 살아오다 보면 익숙한 질서는 안전한 것이 되고 그것을 흔드는 변화는 위험한 것이 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된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럴까.
어릴 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판단하는 일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 사이에 지금처럼 많은 계산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보니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더라. 일단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점점 혼란스러웠다. 나만해도 취준생이었다가, 정규직 사원이었다가, 해외 생활 중에는 잠시 계약직 노동자가 되기도 했고, 싱글이었다가 결혼을 했다가 부모가 되기도 했고, 무주택자였다가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다 주택 보유자가 되기도 했다.
변해온 만큼, 그 경험만큼 나는 다양한 렌즈를 갖게 됐다. 그럴 때마다 어떤 렌즈로 보느냐, 즉 어떤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일이 옳기도, 옳지 않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문제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설령 어느 한쪽의 입장이 옳다고 잠정적 결론을 내더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 누군가의 이해와 동의, 때로는 배려와 희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내 한 몸 바카라임지기도 벅찬데, 세상까지 바카라임지겠다고 나서는 게 때로는 무바카라임하거나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일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부조리를 보면서도 예전처럼 쉽게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안타까운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정에 대해 짐작하게 되었고,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것 이상으로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정과 배려,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더 현명해진 것일까.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머리'의 균형을 갖추면 좋으련만, 어릴 때는 둘 다 마냥 뜨겁기만 했다면 나이를 먹을수록 심장도, 머리도 차가워지는 것만 같다. 누군가의 고통에, 불의에,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고 앞에,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그 뒤에 복잡한 사정이 있을 거라는 말을 핑계 삼아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현실을 알게 된 만큼, 현실을 핑계 삼는 법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변한 것이 맞다. 다만 그 변화를 무조건 ‘타협’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수많은 경험 속에서, 어떤 신념은 희미해지고, 어떤 신념은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켰는지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저 ‘사람은 원래 변하는 거니까’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요즘은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더 현실을 넓고 깊게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더 많이 갖게 된 것일까. 아마 어느 하나의 정답을 고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분명 더 신중해졌지만, 신중함과 비겁함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현실감각과 체념도 그렇다. 어디까지가 현명한 판단이고 어디서부터가 타협인지, 그 경계는 생각보다 선명하지 않다.
아마 그래서 나는 기자가 된 친구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놀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친구가 변해서가 아니라, 그의 얼굴을 통해 내가,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누군가가 변한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미래 모습을 잘 모른다.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도,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게 될지도, 무엇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내가 하게 될 수도 있다. 누군가를 보며 ‘왜 저렇게 변했을까’라고 생각하기 전에 조금 망설이게 된 이유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생각보다 불편하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변하고 싶은가.
한 가지 정도는 기억하고 싶다. 내가 현실을 이유로 무언가와 타협할 때, 그것이 정말 현실의 여러 단면을 고려한 신중한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내가 편해지기 위한 쉬운 선택이었는지 한 번쯤은 돌아보는 것. 선택으로 인해 내가 잃은 것과 얻을 것을 따지더라도, 그 계산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젊을 때의 마음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 마음을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를 계속 시험받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변한다. 나도 변했고,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사람들도 변했고, 앞으로도 나는, 우리는 변할 것이다. ‘왜 다들 변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변해가는 나를 가끔씩 돌아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