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상을 잘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들려오면,
이미 나는 그와 함께할 미래의 미래까지 그려내곤 한다.
우리가 어떤 주말을 보낼지,
어떤 계절을 함께 통과할지,
우리의 대화는 어떤 깊이로 무르익을지.
마음속으로 정교한 미래의 설계를 끝내놓고 나는 혼자 설렌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은 그렇게 나의 예상대로만 되지 않는다.
현실은 늘 나의 상상보다 느릿하고,
때로는 내가 그린 그림과는 전혀 다른 색으로 칠해지기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다.
내 인생에서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온 아귀의 힘을 다해 꽉 쥐었던 관계들은
이상하게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스르륵 빠져나가 버리곤 했다.
마음이 터질 만큼 행복할 때,
혹은 무언가가 무척 기다려질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조급해진다.
'이 인연을 놓치면 어쩌지?'
그런 불안감이 마음에 싹을 틔우는 순간,
관계의 저울은 미묘하게 기울기 시작한다.
상대방의 연락 한 통에 하루의 기분이 천국과 지옥으로 널을 뛰고,
덤덤해 보이는 상대의 말 한마디를 온종일 곱씹으며 나만의 방어벽을 쌓거나 무너뜨리기를 반복한다.
그것이 바로 '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다.
불안은 참 지독해서,
소중한 것을 움켜쥐고 싶어 하는 욕망의 틈새를 타고 가장 먼저 자라난다.
그리고 끝내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며 내면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이 지독한 결핍감은 상대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키워낸 그림자일 뿐이다.
물리학에서 자석의 인력은 억지로 가까이 밀어붙인다고 해서 강해지지 않는다.
각자의 고유한 자성을 유지하며 적당한 거리를 둘 때,
비로소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이끌림이 발생한다.
남녀 관계의 역학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내가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때 생기는 아우라가,
쫓기듯 상대를 끌어당기려 애쓰는 애처로운 플러팅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다.
관계에서 한 사람이 불안이나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공기는 숨길 수 없이 상대에게 전달된다.
한쪽이 잃어버릴까 두려워 손을 뻗어 꽉 쥐려 할수록,
다른 한쪽은 나만의 경계선과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 한 걸음 물러서게 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역학을 머리로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려 먼저 어색한 벽을 치곤 했다.
그리고 그 섣부른 벽은 여지없이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그 벽은 상대를 밀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낯설고 강렬한 이끌림 속에서 내 페이스를 잃고 흔들릴까 봐 세워둔 나만의 한계선이었다.
하지만 섣부른 방어는 또 다른 오해를 낳고,
서로를 밀어내는 악순환의 궤도를 만들 뿐이었다.
진짜 매력은 상대방이 만든 페이스나 내 안의 조급함에 말려들지 않는 '나의 평정심'에서 나온다.
상대를 갖고 싶은 나의 욕심이 상대의 무심함이나 방어적인 태도에 서운함으로 맞붙는 순간
관계는 진흙탕이 되지만,
내 안의 요동치는 감정을 가만히 가라앉히고
그것을 '그 사람만의 속도와 사정'으로 고요히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판도가 바뀐다.
내가 먼저 내 마음의 아귀에서 힘을 빼고 내 본연의 궤도를 멋지게 돌고 있을 때,
상대는 오히려 내가 완전히 통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묘한 긴장감과 매력을 느끼며 다가오기 마련이다.
관계의 주도권은 언제나 불안에 휩싸여 더 많이 보여주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단단하게 지키며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로 흐른다.
그냥 나의 삶을 잘 살고 있는 것이 그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유일한 치트키다.
가장 강력한 필살기는 상대를 향해 안달을 내는 마음을 거두고,
화살표를 다시 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얽힌 실타래를 풀고,
내 마음을 지키는 단 하나의 열쇠다.
오전에는 오롯이 나만을 위해 땀을 흘리고,
낮 시간에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일터에서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하게 중심을 잡고,
틈틈이 내 영혼을 채우는 밀도 높은 일상.
이렇게 내 삶을 사랑하고 가꾸는 사람은 상대의 연락 하나에 내 하루를 저당 잡히거나 일희일비할 겨를이 없다.
상대의 안부가 도착했을 때,
답장의 자음 하나까지 고민하며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답해야 이 사람을 잡을까'가 아니라,
'내 매력적인 일상에 이 사람을 어떻게 초대할까' 하는 확신을 가지면 그만이다.
칼답 대신 내 루틴을 여유롭게 마치고 던지는 툭 한마디의 여유.
그것이 바로 감정이라는 파도를 여유롭게 넘긴 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섹시하고 단단한 아우라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사랑 앞에서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간절할수록 쥐려 하지 않고,
밀려오는 감정을 단단함으로 치환하며 나를 더 깊게 채워낼 것이다.
내가 온전한 빛을 발하고 있다면,
나를 놓치기 싫어 꽉 붙잡아야 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될 테니까.
사랑은 억지로 움켜쥐는 손아귀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열어둔 두 팔 사이에 머무는 달콤한 평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