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길

by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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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짙어진 안개가 아침까지 걷히지 않았다. 여덟 시가 지났는데도 창밖은 여전히 뿌옜다. 창가에 서면 보이던 산이 사라졌다. 손녀와 함께 다니던 산바카라길마저 보이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는 길을 잃는다. 어디에서 길이 굽고, 어디쯤 나무가 서 있는지 안다. 수없이 다녔던 길이지만 몇 걸음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홉 시가 지나자 구름 사이로 햇살이 언뜻언뜻 비쳤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가 햇살 아래, 소리 없이 물러갔다. 그제야 길 건너 숲이 보이고 산바카라길도 나타났다. 오후 들어서는 아침에 안개가 끼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인생도 그랬다. 앞길을 알고 걸었던 적이 있었던가. 길을 잘못 들기도 했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저 멀리 불빛이 보이면 그곳으로 가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었다. 지나온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도, 그때 왜 그렇게 먼 길을 에둘러 왔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이제야 선명하다.


내 기억을 그대로 안고 청춘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삶은 낙장불입이어서 이미 내놓은 패를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지금의 청춘에게 그대로 들려줄 수도 없다. 그들이 안개 속에서 어떤 길을 만날지 나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부딪치고 때로는 깨지면서 자기 길을 찾아간다. 자식들에게조차 쉽게 인생을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조카도 지금 그 안개 속에 서 있다. 사랑과 결혼을 두고 가족과 뜻이 갈렸다. 당사자에게는 평생이 걸린 문제이고, 가족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앞날이 걸린 문제다.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젊은 날에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세상 전부가 되기도 한다.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삶마저 무너질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그 마음을 어찌 가볍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게 어디 사랑뿐이었을까. 어떤 선택 앞에서는 그것이 내 인생을 결정할 마지막 선택처럼 여겨졌다.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는 전부였던 것이 지금은 인생길의 한 구간이 되어 있다. 그때의 사랑이 가벼웠던 것도, 아픔이 작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살아보니 젊은 시절 상상했던 것보다 삶이 훨씬 길고 넓었다.


조카에게 어느 길로 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 역시 내 앞의 길을 다 알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 먼저 조금 더 걸어본 사람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지 말라는 것도 돌아서라는 것도 아니다. 안개가 조금 엷어질 때까지 잠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도,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도, 그 선택 뒤에 이어질 자신의 긴 삶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안개가 걷힌 뒤에도 그 길이라면 그때 걸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기다린다고 사라지는 것일까.


불멸의 사랑으로 남은 이야기들을 떠올려본다. 어떤 사랑은 이별했기에 영원해졌고, 어떤 사랑은 죽음 앞에서 멈추었기에 처음의 모습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결혼은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침을 맞고 저녁을 보내며 수많은 평범한 날을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나이가 들고 일상이 반복되다 보면 사람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대화가 줄어들기도 하고, 어느 순간 연인보다 동지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안개가 걷힌 자리에 언제나 맑은 하늘만 있는 것은 아니듯이.


조카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들이 살아서 불멸의 사랑을 완성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 길을 오래 함께 걸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지금의 갈림길도 언젠가는 지나온 길이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지금 보이지 않는 길도 조금은 선명해져 있을 것이다. 안개 걷힌 오늘 아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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