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남은 여름은 몇 번일까?
창문을 열자 부드러워진 공기가 얼굴에 와닿는다. 차다고 하기에는 이르고, 여름 열기만 슬그머니 빠져나간 듯하다. 눅눅한 습기가 걷힌 바람은 한결 가볍다. 늦여름과 가을 초입, 그 어딘가에서 오는 바람은 커튼을 살짝 흔들고 목덜미를 서늘하게 어루만진다.
여름내 뜨거운 햇살 때문에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했던 하늘. 모처럼 고개를 든다. 산등성이에 내려 앉은 구름과 맑고 투명한 하늘. 오늘따라 온통 파랑으로 가득하다. 하나의 파랑이 아니라 층층이 다른 파랑이다.
동쪽 지평선 가까이에 옅은 코발트 블루. 눈을 올리면 울트라마린 블루, 이어가면 네이비 블루로 파랑이 깊어진다. 그 사이에는 공작새의 목덜미처럼 초록 기운이 감도는 피코크 블루도 보인다. 가을은 파랑 하나에도 서로 다른 빛깔을 풀어놓는다.
새벽녘, 아파트 뒤 산골에서 선들바람이 내려온다. 부드럽지만 서늘한 바람은 풀잎을 흔들며 도시를 감싼다. 가을이 깊어지면 쓸쓸한 소슬바람이 내 창을 두드릴 것이다. 짙게 물든 단풍마저 절정을 지나면, 겨울을 몰고 된바람이 찾아올 것이다.
산바카라길 풍경도 한결 차분해졌다. 풀숲 가까이에서는 밤새 내려앉은 이슬 냄새가 난다. 여름 한철을 수놓던 들꽃들은 하나둘 고개를 떨구고, 배롱나무 붉은 꽃빛도 조금씩 바래간다.
아침부터 요란하던 매미의 떼창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산바카라을 나섰다가 왠지 허전해 걸음을 멈췄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어디선가 매미 한 마리가 운다. 한여름의 당당했던 기세는 사라지고 처연한 목소리만 남았다.
어둠이 내리자 울기 시작한 귀뚜라미 울음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던 매미 소리는 사라지고 이제 땅 가까이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잔잔하게 번진다. 여름이 떠난 자리는 고요한 가을의 차지다.
하지만 한낮은 여전히 여름이 주인이다. 아침에 걸쳤던 얇은 겉옷도 정오가 가까워지면 벗어 든다. 햇살도 결이 달라졌다. 공기는 한결 맑고 부드러워졌고, 나뭇잎의 윤곽도 또렷하다. 햇살은 가을색을 꺼내기 시작했다.
발길은 논둑에서 멈췄다. 햇살 아래 익어가는 벼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여름내 꼿꼿하던 벼 이삭에 서서히 알곡이 차오른다. 알곡이 여물수록 벼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힌다. 지나는 바람에 벼들이 몸을 기울였다가 일어선다. 논빛은 짙은 초록에서 연두와 노랑으로 한창 옮겨가는 중이다.
논 건너 산골 폐가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제법 깊은 산골이었다. 주인 잃은 감나무에는 비스듬히 햇살이 걸렸고, 올해도 어김없이 튼실한 열매가 달렸다. 몇 알에는 벌써 노란빛이 오르고 있다.
올여름은 참으로 무더웠다. 남녘에서는 기온이 40도를 넘는다는 소식이 잇따라 들려왔다.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더위였다. 그런 여름도 떠날 채비에 분주하다. 여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지긋지긋했던 시간이 벌써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계절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다. 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여름은 올 것이다. 그때마다 아파트 화단에서 매미가 울고, 논에서는 벼가 자랄 것이다. 산골 폐가의 감나무에서는 감이 익을 것이다. 가을이 오면 하늘은 다시 높아지고 선들바람은 사람들의 목덜미를 스칠 것이다.
여름과 함께 떠난 나의 8월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와도, 지난여름 함께 떠난 나는 함께 오지 않는다. 계절만 홀로 제자리를 찾아올 것이다
나이가 들면 쌓이는 것보다 사라지는 것이 많아진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도 오늘의 내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순간이 조금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게 주어진 또 한 번의 여름이 떠나고 있다. 여름은 다시 오지만, 나는 몇 번이나 더 여름을 맞을까. 서두르지 않아야겠지만 머뭇거려서도 안 될 것이다.
볕이 좋은 날에는 좋은 사람을 만나야겠다. 독기 빠진 햇살이 내리는 거리를 함께 걸어도 좋다.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가벼운 수다로 오후 한나절을 보내도 좋겠다. 돌아오는 길에 함께 맞는 서늘한 바람은 또 어떤가.
이런 날도 언젠가 사위어 갈 것이다. 그러니 좋은 날을 자꾸 뒤로 미루지는 말아야겠다.
가을이 오는 길목이다.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