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가 남긴 기시감

내 여행에 왜 자꾸만 억울함이 따라 붙을까

by노푸름

해고 여행 파트너


때마침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해고를 당한 친구가 있어 함께 교토로 떠나기로 했다. 그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쓰고 싶었으나, 그 친구는 해고 여행에서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않았다며, 싱겁게 사양했다. 그건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내게는 아쉬운 일이었으나, 당사자는 아무런 근심 없이 여행을 즐겼다는 뜻이었으므로 그 솔직한 거절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가고 싶은 곳이 비슷했고, 취향이 잘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5년이나 연애를 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해고 당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두 사람 모두 해고 당한 다니. 화보다 헛웃음이 먼저 날 정도로 황당했다. 그런 둘이 여행이라니. 팔자 좋다며 핀잔을 주거나 철이 덜 들었다는 잔소리를 피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나의 남자친구는 그 핀잔에서 예외로 두어도 좋을 것이, 그는 건축 설계사로, 해고된 후에 일 년에 두 번 있는 건축사 자격증 시험을 치르려 5개월 동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동영상 강의를 듣고 운동을 한 후에 스터디 카페에 가서 제도판 위에 몇 백 개의 직선을 반듯하게 긋고 지우기를 반복할 정도로 근면했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나와의 데이트도 포기하고 해가 뜨기 전에 건축기사 학원에 가서 앞자리를 맡아 두고 간단히 끼니를 떼우고 밤이 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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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 갈 때면 우리 집에서 가장 큰 가방인 새파란 이케아 백에 삼각자와 공업용 계산기, 타이머, 집게, 각종 필기 도구가 든 오거나이저를 넣어 들고 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석탑처럼 쌓은 여러 개의 쟁반을 머리에 이고 중심을 잃지 않고 배달을 하는 자전거 탄 먼 이국의 젊은이와 그것과 닮아있었다. 태양은 젊은이의 비지 땀을 보기 위해 더욱 가열차게 들끓었다. 그 모습을 5개월 정도 보고 있으니 이제 태양은 그 대가를 남자친구와 먼 이국의 배달원에게도 갚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태양은 그들에게 빚을 갚지 않았고, 남자친구는 시험 결과가 나온 후부터 넓은 제도판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남자친구는 안방에 있는 침대에서 잘 나오지도 않고 성실함을 잃어버렸지만, 내가 요새 기분이 어떠냐 물으면 뭘 어떠냐며 자신은 언제나 행복하다고 했다. 그 말을 믿기 어려웠지만 사실이었다. 그는 그런 실의와 절망과 싸우는 걸 즐기는 타입인지 자신을 둘러싼 좌절을 삶의 원동력처럼 여겼다. 그 좌절을 가만히 두면 눈깜짝할 사이에 커버려서 괴물이 될 것 같은 위기의식이었을까.


옆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계나 살림에 무바카라임하다는 불평과 함께 자신을 모조리 불태운 뒤 아무런 미련 없는 그의 태평함에 안도감을 느끼는 모순적인 나를 발견했다. 그건 내 생애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희망이었다. ‘저렇게 실패해도 괜찮구나’라는 유래 없이 현실적인 희망.


나는 남자친구에게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돈이라곤 한푼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이 철부지 실직자 두 명은 여행을 떠날 생각에 실직의 슬픔도, 미래에 불안함도 씻은 듯이 잊혀지는 걸 느끼며 어쩌면 여행이란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과 확실한 미래와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가치있는 사치라 생각했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찾기는 쉬웠다. 해가 늦게 뜨는 날에 출국하고, 해가 뜰 때 입국하는 비행기는 저렴했다. 늘 우리의 땀을 착취하던 태양이 이자까지 쳐서 진 빚을 갚는구나. 단 1원의 손해도 없이 여행을 즐기리라.


동방예의지국의 뮤비 감상법


인천공항에서 할 일은 많았다. 환전과 이심 발급, 항공권 발권까지. 해외 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은 제 집처럼 편한 것이 인천공항이지만, 오랜만에 오는 인천공항은 갓 상경한 시골 뜨내기처럼 움츠러들게 만든다. 보통 2시간 전에 간다던데, ‘혹시 모르니’, ‘혹시 모르니’가 하나씩 더해져 1시간을 일찍 가게 되었고 그 덕분에 항공권 발권 오픈도 전에 출국까지 3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벤치에 앉아 바카라을 보고 있었다. 그 때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동남아 사람과 중동 중간 정도의 구리빛 피부의 170 정도의 크지 않은 체구인 점은 평범했지만, 그보다 그의 외모에 눈길이 가지 않았던 건, 그보다 더 눈길을 사로 잡는 거대한 캐리어 때문이었다. 이민자용 크기나 될까. 저기에 작은 사람이 들어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에 심상치 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투명 테이프로 꽁꽁 말았다. 보안 검색대에 걸리지 않으려는 심산인가. 그런 생각이 치밀자 그 캐리어가 무섭게 느껴졌다.


“광주. 절.라.도?”


그는 전라도 광주에 있는 공장에서 2년 동안 일하고 자신의 고국인 네팔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는 기다리기 심심한지 우리에게 말을 계속 걸었고, 우리도 바카라을 덮고 본격적으로 그와 대화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우 올드 아유?”

“아임 투애니원.”


그는 손가락으로 말하고 번역기로 한 번 더 일러주었다. 우리는 액면가의 심히 놀랐고, 그것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실례로 금세 친해졌다. 남자친구는 잘 모르는 사람과도 이야기를 잘 나누는 스타일이라 그들의 대화를 간간히 들으며 대화에 끼고 싶은 게 있으면 번역기를 켜서 네팔어로 들려주었다.


“you know youtube?(유튜브 알아요?)”

“오, 유튭~”

“What, What the favorite song? (좋아하는 노래가 뭐예요?)”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려고 유튜브를 들어갔다가 영 못 찾겠는지 카지노톡의 URL을 통해서 접속했다. 네팔에서 유행하는 뮤직비디오인가 하고, 우리 셋은 작은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뮤직비디오의 시작은 어떤 호텔방에 여성의 모습이 등장했다. 여성은 여기저기 움직이더니 호텔 방문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성의 엉덩이가 보였다. 나는 흠칫 놀랐지만, 한국의 온 외국인 손님의 문화를 보고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거나 놀라는 건 동방예의지국에서 보여선 안 될 행실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까짓 엉덩이는 아무 것도 아닌 척 ‘오~’라는 추임새까지 넣으며 이건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내게 주문을 걸었다.

image.png브이로그 찍는 와중에 '뜨악'

그런데 어쩐지 다음 장면이나, 화려한 화면으로 바뀌지 안고 뮤비 속 여주인공은 그 호텔 방에 있는 장면만 나왔다. 자세히 들으니 노래도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문화 차이를 좁히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영상이 1분 정도 흐르고, 그 후에 여자가 화면 가까이 다가오자 네팔 청년은 황급히 핸드폰화면을 껐다.


“웁스, 쏘리.”


네팔에서 최신 유행하는 노래의 뮤직비디오인 줄 알고 감상했던 뮤직비디오의 정체는 친한 친구들끼리 주고 받는 야한 동영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외설적인 동영상을 공공장소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시청하는 인천공항의 변태 삼총사가 되어 있었다. 누가 우리를 보고 있다면 이건 ‘공항 도둑’ 못지 않은 흑역사로 남겠지. 내가 지금 뭘 본 건가 싶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술적인 영화인 줄 알고, 1분이나 다음 장면이 나오길 기다린 우리가 우스워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한국-네팔’의 국교 자리가 그의 취향으로 숨 막히게 어색해졌다.


우리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배고프다는 핑계로 다른 자리로 옮겼다.

네팔 친구는 자신의 고향으로 잘 돌아갔을까.

차라리 케이팝을 추천해 줄 걸 그랬나.


간사이 대공황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얼마 만에 간사이인가. 2016년도쯤이었나. 단짝 친구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갔던 게 바로 오사카였다. 그때는 뭣 모르고 친구를 따라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면 여행을 리드했던 친구가 대단하구나 싶다. 얼마나 많이 알아보고, 검색했던가. 나의 지난 여행은 차치하고, 이제 내 앞에는 내가 지도를 보고, 찾아 가고, 직접 소통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공항에 들어왔다. 아침에 인천공항에 너무 일찍 도착한 나머지 스마트폰 밧데리가 3%다. 교토로 가는 기차표 QR 코드도, 번역기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모두 그림의 떡이었다.

우선은 밧데리를 충전하자고 했다. 캐리어를 열고 급하게 충전 선을 꺼냈다. 충전을 하면서 우리가 갈 곳을 찾아보고, 내 트래블 카드사 중 수수료율이 가장 낮은 ATM기기를 찾아 나섰다. ‘분홍색’ ATM 기를 찾았지만 여행객에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있었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다른 ATM기에 줄을 서 있었지만, 이 분홍색 ATM 기기만 줄 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괜한 의구심이 들기에 충분한 단서였다.


‘이 ATM기기만 왜 사람이 없지? 이상한가?’

‘내가 알아온 정보가 잘못됐나.’


하는 각종 물음표가 생겨서 어지러웠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 정보를 믿어보기로 했다. 설상가상으로 기기 번역의 ‘한국어’만 없었다. 일본 여행객의 영어권 관광객보다 한국인이 훨씬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필 이런 기기를 찾은 나도 용하다. 대충 영어로 번역된 메뉴를 보고 눌러 보았다. 이제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뉴가 떴고, 거의 다 됐다고 생각했지만, 기막힌 관문이 기다렸다.


[비밀번호 6자리를 입력하시오.]


은행 비밀번호는 전세계적으로 4자리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일본은 6자리라는 걸 미처 알지 못한 나는 당황했다. ATM 기기의 첫화면으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와도 누르라는 비밀번호는 6자리였다. 4자리를 눌러도 내가 간절히 바라는 [다음] 버튼이나, [확인] 버튼은 활성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엔화를 가지려는 내 노력에 간사이가 겐세이를 놓는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상황을 남자친구에게 알렸더니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네이버에 찾아보니, 뒤에 두 자리는 0으로 입력하면 된다는 힌트를 찾았다. 방탈출 게임의 재미를 간사이 공항에서 알아버릴 줄이야. 그렇게 누른 후에 앙증맞은 엔화 지폐가 나왔다. 퀘스트 하나를 깬 것이 신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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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JR 하루카 열차 플랫폼을 찾아 3층으로 올라갔다. 광활한 브릿지가 넓게 펼쳐졌다. 그 브릿지를 건너 가니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우리가 찾는 하루카 열차를 찾아 헤맸다. 그 사이 우리가 알아둔 하루카 열차 탑승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표도 끊지 못했는데, 기차를 타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이 억울한 감정에 기시감이 든다.


지난 9월, 한적한 가을의 선선함이 일상의 고단함을 누그러뜨릴 때 부사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푸름 씨, 그게… 있잖아. 사장님이 푸름 씨를 자르는 걸로…그렇게 됐어…”

기시감을 만든 원흉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노푸름입니다.

지난 글에도 많은 관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글은 인천공항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갈 때 생긴 이야기입니다.

황당하기도 한데, 지난 일이니 이렇게 웃으며 쓸 수 있네요.

'뭐 저런 걸 가지고 놀라나.' 하시는 분들이 놀리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모로 보나 소심한 겁쟁이랍니다.


다음 화에서는 교토 여행 첫날을 소개합니다.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