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비를 횡령해 본 적 있으십니까?

그린하우스의 카스텔라, 엄마의 빛나던 청춘

by김만끽

엄마는 흔한 버스비 횡령자(?)였다.

고등학생 때 외할아버지가 한 달 치 차비를 주면 그 돈으로 엄마는 친구들과 이대에서 놀았다.


그 시절 이대 앞에는 상징적인 빵집이 있었다. 이화여대생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남학생들의 대기소이자, 여대생들의 미팅과 군것질이 이어지던 자리였다. 그 이름은 ‘그린하우스.’ 엄마의 여고 시절 이야기를 들은 후 “연대생에게 독수리다방이 있다면, 이대생에겐 그린하우스가 있다”는 글귀를 어디선가 보았다.


이 글은 당시 신촌·이대 앞을 다니던 이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엄마의 젊은 날이 그 옛날 그 거리 어딘가에 겹겹이 남아 있을 것만 같다고 느낀다.


엄마는 버스비를 하루 만에 몽땅 써, 좋아하는 카스텔라로 뱃심을 채운 뒤, 친구들과 북아현동까지 가서 놀았다. 창천동 집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탕진 덕분에 내내 걸어 돌아왔다.


그린하우스는 2003년에 문을 닫았단다.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어릴 때라도 엄마랑 그곳에 같이 가서, 엄마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버스비를 기꺼이 탕진한 맛을 엄마 옆에서 같이 맛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도 마음 한편이 조금은 아쉽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그 경험이 있어서였을까, 내가 중학생 때 버스비를 주 단위로 나누어 주었다. (물론 형편이 좋지 않아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엄마에 그 딸인 것을. 나 역시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생 당시 유행했던 장우동을 열심히 다녔다. 물론 엄마가 준 버스비를 아끼고 아껴 모은 뒤, 비빔만두와 김밥으로 탕진의 쾌감을 만끽했다.


각자 탕진의 맛을 즐겼지만, 엄마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무엇을 먹었는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가가 다를 것 같다. 엄마는 빵, 나는 분식. 엄마는 여전히 빵을 좋아하는 빵순이다.



엄마가 그린하우스에서 친구들과 쌓은 추억이 무색하게 엄마는 나이 들어 만난 정숙이 아줌마를 빼고는 오래도록 친구들과 연이 끊긴 채 살아왔다. 그리운 친구를 찾을 엄두도 못했을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엄마의 세월은 흉흉했고, 서글펐다.


엄마는 망칠, 예순을 훌쩍 넘겨 일흔을 바라보는 즈음에서야 SNS 문명을 맛봤다. 그 덕에 미국에 사는 여고 동창 경희아줌마를 찾았고, 경희 아줌마와 다른 친구와 어울려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있다.


오랜 세월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친구들이 타국 여행길에 오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마음과 형편이 다 맞지 않아도 청춘의 추억으로 예전과 다른 용기를 내어 친구들과 길을 걷는다.


나는 후커밸리 사건 이후로 엄마를 해외로 보내는 일이 늘 불안해서, 내심 불발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내 욕심, 내 두려움이다.


물론 나는 엄마가 과거의 엄마와 만나는 것, 그리운 시간을 되살리는 것을 추호도 방해할 생각이 없다. 엄마 역시 나로 인해 추억이 극대화될 시간을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결국 바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엄마의 이야기가, 어디를 가든 더 풍성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