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참, 귀찮게 하네.

엄마는 노른자를 싫어해

by김만끽


거 참, 귀찮게 하네.


서울 여고생이던 엄마가 그린하우스를 드나들던 시간은 지나고, 지금 엄마는 부산 달맞이언덕 카페에서 노른자를 피한다. 이번에는 버스비가 아니라 노른자 하나를 두고 나와 실랑이를 벌인다.


달맞이언덕 초입에 있던 카페 듀스포레에서

나는 연어 달걀 샌드위치를, 엄마는 아보카도 샐러드를 시켰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샌드위치 위 수란을 터뜨렸다. 그러자 엄마가 “어후” 하고 싫은 소리를 냈다.

이럴 때, 우리 대화는 늘 스무고개처럼 흘러간다.


“왜?”

엄마는 짧게 “노른자”라고 했다.


짧은 한마디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노른자가 왜 싫어?”라고 캐물었다.


엄마는 “거 참, 귀찮게 하네” 라며 한숨을 섞고 나서야 말했다.

"노른자 비린내가 싫어."


언제부터 싫었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얼버무린다. 달걀 먹고 심하게 체한 적이 있기는 한데, 그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덧붙인다. 날달걀도 싫은데 메추리알은 더 싫다고 했다. 계란도 아닌 것이 크기가 작아서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릴 때는 날달걀도 잘 먹었다는 말도 한다. 도대체 엄마의 입맛 기준을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 엄마가 나보다 더 입이 짧냐, 가리는 것도 많다”고 쫑알댔다.


그리고 왜 나에게는 날달걀을 안 먹였냐고 물었다. 엄마는 “유기농이 아니니까 안 먹였겠지. 참 성가시게 구네”라고 말끝을 흐린다. 그러고는 “입이 길면 두루미지, 그게 사람이냐?”라는 할매 개그로, 늘 그렇듯 내 다음 질문을 가볍게 막아 버린다.


나는 매번 엄마를 귀찮게 굴다 꾸중을 듣고서야 안다. 엄마의 입맛 하나를 알아내는 일도 이렇게 여러 번 질문을 건너야만 닿는다는 것을. 엄마에 대해 알게 된 조각들을 모아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세월이 궁금해진다.


엄마는 질문을 많이 해야 조금씩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시절의 엄마는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 집을 나섰다. 엄마의 부재는 훗날 내가 혼자 어림해야 할 엄마의 과거가 되었다.





장집사가 없으면 교회 일이 안 됐지.


신앙을 가진 후, 엄마는 교회 봉사에 열심을 다했다. ‘장집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가끔 만나는 권사님들이 나를 볼 때마다 말한다.

"예전에는 장집사 없으면 교회 일이 안 돌아갔지."


그렇다. 엄마는 교회 봉사라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국민학생이 되고 나서는 낮에 엄마가 집에 있을 때보다 없었던 기억이 더 많다.


특히 엄마가 저녁까지 없던 날들도 있었다. 교회 가을 바자회를 준비하는 날들이었다. 바자회 때마다 나는 엄마가 떡볶이나 수수전을 팔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가 모교회를 떠나 본격적으로 다른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엄마는 고춧가루만 팔았다.


엄마는 권사님, 집사님들과 함께 경북 영양과 청송에 가서 고추를 사 왔다. 그 고추를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고, 바자회에서 팔았다. 때는 1990년대였다.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촘촘하게 이어져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한 곳만 다녀와도 오전에 나간 엄마는 저녁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매년 엄마는 자신의 열정을 그렇게 쏟아부었다. 바자회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여전도회 모임, 구역 모임에 열심히 참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 교회는 신앙을 지키는 곳이면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부산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을 것 같다.


어린 나에게 엄마가 집에 없는 것은, 어떨 때는 잔소리할 사람 없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서 좋기도 했다. 그렇지만 겨레붙이¹랑 싸우기라도 하는 날에는, 엄마 없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엄마가 있다고 해서 겨레붙이가 괴롭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제재할 사람이 있어 안심할 수 있었다.


친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었지만, 낮에는 볼일을 보러 나가는 일이 잦았다. 엄마도, 친할머니도 없는 날, 집 열쇠의 행방마저 모르면 나는 기행을 펼치곤 했다.


그때는 아파트 현관에도 숫자키가 없던 시절이었다. 선택지는 2가지였다. 누군가가 오기 전까지 집 앞에서 기다리거나, 아파트 1층 현관 위의 낮은 옥상으로 올라가 철제 빨래 건조대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창문으로 집에 들어가거나.


학교를 마치고 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고 열쇠도 없던 날, 나는 그렇게 집에 들어갔다.


엄마에게는 장집사에서 목사로 자신의 길을 넓혀가는 시간이었고, 나에게는 창문을 넘어 집에 들어가는 나대로의 생존법을 익혀가는 시간이었다.





겨레붙이¹

'핏줄'이라는 뜻을 지녔다. 오빠와 나는 피로 이어져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그다지 가깝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당신을 알아가는 중에서는 '오빠' 대신 '겨레붙이'라고 부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