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혼자라고 생각했던 날들]
생활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런데 나까지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인도에 가기 전에는 이번 여행에 뭔가 특별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래전 읽은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처럼, 영적인 스승을 만나거나 낯선 사람과 뜻밖의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출국을 닷새 앞두고 홀리가 고양이별로 갔다. 그때는 내 여행이 망한 줄 알았다. 아니, 아예 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녀와 보니 충분히 특별한 여행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인도에서 돌아온 뒤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전에는 엄두가 나지 않던 일들도 이제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아껴두기만 했던 인도에도 결국 다녀왔고, 홀리가 없는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지만 어느새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나는 결국 그 시간 들을 지나 왔고, 또 지내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들도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오래도록 미뤄둔, 어쩌면 애써 외면해 온 일을 이제는 마주해야 할 것 같았다. 이번에도 미루면 또 언제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오래 만난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말하는 일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는 5년을 넘게 사귀었다. 매일 아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Pagi!(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건넸고, 함께 떠오르는 해를 보며 서핑을 했다. 발리가 닳도록 곳곳을 찾아 다녔으며, 함께 밥을 먹는 사람과 운동하는 사람,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심심할 때 맥주 한잔을 하는 사람, 이 모두가 그였다. 그와 헤어지는 일은 친구와 연인을 한꺼번에 잃는 것이었다.
홀리가 떠난 뒤, 카페에 마주 앉아 함께 울면서 밥을 먹었던 사람도 그였다. 내가 홀리 이야기를 꺼내면 함께한 추억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같은 고양이를 기억하고, 같은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위로였다.
그는 발리 사람이었고, 나는 발리에 사는 외국인이었다. 그는 관광객들은 좀처럼 찾아가지 않는,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작은 식당에 나를 데려가곤 했다. 메뉴판도 없는 가게에서 익숙하게 음식을 주문하고, 길을 걷다 마주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때로는 나를 자신의 친구와 가족들에게 소개했다. 그렇게 나에게도 이곳에서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겼다.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발리는 더 이상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싸움을 반복했다. 싸우다가 화해하고, 또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몇 번이고 이별을 미뤘다. 좋을 때는 여전히 좋았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 잠시 잊기도 했다.
하지만 5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우리의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함께하는 지금이 아무리 좋아도,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둘 다 함께 할 미래를 그리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거다. 다만 누구도 먼저 이별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내가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말을 꺼내자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5년이 넘는 관계를 끝냈다.
관계를 끝내고 한바탕 울고나니 생각보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토록 오래 망설였는데, 막상 끝내고 나니 오래전에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한 것 같았다.
헤어졌다고 해서 함께한 날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홀리와 함께 보낸 시간도, 평범한 날들도 여전히 소중했다.
그가 없는 발리에서 어떻게 지내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 없이 살아보기로 했다.
안녕,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