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멀리 와서야 보이는 것들]
아픈 몸을 끌고 여행은 계속되었고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고 나니 어느새 돌아갈 날이 가까워져 있었다.
동행을 처음 시작했던 레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정이 든 친구들과 작별을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헤어지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아마 짧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함께해줘서 고마웠던 마음과, 아픈 나를 챙기게 해 미안했던 마음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긴 편지를 남겼다.
레에 처음 도착한 날이 떠올랐다.
며칠을 울어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몸은 고산에 적응하지 못해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다. 고작 일주일 남짓 전의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기분도 사뭇 달랐다. 나는 원래 여행지에 가면 카페에 가만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딱히 무엇을 하지 않고 낯선 동네의 하루가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 좋다.
그런데 처음 레에 도착했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 생각이 많아져서 차라리 밖으로 나가 걷곤 했다. 숨이 차면 천천히 걷고, 괜찮아지면 또 걷고. 그렇게 레의 골목을 돌아다녔다.
이제서야 그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해보고 싶었다. 새벽 일찍, 아직 거리가 붐비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시장 한쪽에는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라다크의 특산물인 살구를 팔고 있었다.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할머니 한 분이 살구 하나를 내밀며 먹어보라고 손짓했다. 살구를 통째로 입에 넣고 깨물자 기분 좋은 단맛이 퍼졌다.
류시화 시인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서 라다크의 말린 살구를 천국의 열매라고 표현한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살구를 라다크의 청량한 바람과 쨍한 햇빛 아래 말리면 얼마나 더 맛있어질까.
살구를 다 먹고 씨를 손바닥에 뱉어 버릴 곳을 찾자, 할머니는 그 씨를 자신에게 달라고 손짓했다. 씨를 작은 나무 상자에 넣고 뚜껑을 힘껏 누르자 ‘뽀각’ 하는 소리가 났다. 딱딱한 씨 안에서 작은 알맹이가 나왔다. 할머니가 건넨 것을 먹어보니 아몬드와 비슷한 맛이 났다. 다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입이 더 남아 있었다. 살구는 끝까지 제법 다정한 과일이었다. 나는 살구 한 봉지를 사 들고 레의 메인 바자르로 향했다.
새벽의 레, 메인 바자르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는 천천히 걷다 바자르가 한눈에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레의 메인 바자르는 내게 동화 속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특히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더욱 그랬다. 아직 아무도 펼치지 않은 바카라의 한 페이지에 먼저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처음 왔을 때부터 나는 이곳이 좋았다. 몇 번을 다시 걸어도 그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설명하려 하면 늘 말이 조금 모자랐다. 다만 이 거리에 들어서면 걸음이 느려지고,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머리 위에는 형형색색의 타르초가 걸려 있었다. 파랑과 하양, 빨강과 초록, 노랑의 작은 천들이 새벽바람에 펄렁였다. 잠시 바람이 잠잠해지면 늘어져 있다가, 다시 불어오면 하나둘 몸을 뒤집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 위에서 그 움직임만은 쉬지 않았다.
타르초는 기도를 적어 바람에 맡기는 깃발이라고 한다. 다섯 빛깔에는 하늘과 바람, 불과 물, 땅의 의미가 담겨 있고, 깃발이 나부낄 때마다 깃발에 적은 기원이 바람을 타고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고 믿는다고 했다. 누군가의 평안과 모든 생명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저 작은 천들에 담겨 있는 셈이었다.
나는 달콤한 살구를 한 입 가득 넣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살구 한 입.
바람에 팔랑이는 타르초 한 번.
살구 한 입.
바람에 팔랑이는 타르초 한 번.
그렇게 상점들이 하나둘 문을 열 때까지 나는 벤치에 오래 앉아 있었다.
여행을 떠날 때는 홀리가 없는 삶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휴대폰에 달아둔 홀리의 유품을 자주 만지작거렸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홀리와 연결했다. 그렇다고 여행 내내 슬픔 속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감탄했고,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과 웃었고, 예상치 못한 일에 신이 나기도 했다.
홀리를 그리워하면서도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여행이 이어질수록 그것도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홀리를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고, 떠오르더라도 매번 울지는 않았다. 휴대폰에 달린 홀리의 목줄을 일부러 만지지 않고도 하루를 보냈다.
처음에는 그런 변화가 낯설었다. 하지만 홀리를 떠올리는 횟수가 줄어든다고 해서 함께했던 시간까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보고 싶었고, 문득 생각나는 사소한 기억들도 있었다. 다만 이제는 홀리가 곁에 없다는 슬픔에 오래 머물지 않고 눈앞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홀리가 없는 집으로. 아니, 엄마와 몰리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엄마와 몰리가 너무 보고 싶었다.
레에서 델리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창밖에는 히말라야의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산을 바라보자 어김없이 님스다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홀리가 따라왔다. 막연하게 둘 다 좋은 곳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눈물이 났다. 고산병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눈물 흘릴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조금 달랐다. 미안해서도, 안타까워서도, 슬퍼서도 아니었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결국은 괜찮아질 것 같았다.
라다크 지역의 청정한 자연의 기운과,
맑은 영혼들이 지닌 선한 파동의 여운과 함께
발리에서도 청정하고 선량하고 고양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오가시는 여행길도 안전하시길 기원합니다.
— 스님이 보내온 이메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