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 중앙시장 뒤편, 진주상무사 대청마루 천장에는 이 건물을 다시 세운 이들의 이름이 나란히 걸려 있다. 1936년 대홍수로 건물이 유실된 뒤 지역 상인들이 의연금을 모아 1938년부터 지금 자리에 다시 세울 때 남긴 기부자 명단이다. 그 목록 어딘가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의 이름이 있다.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가가 된 인물조차 이 도시에서는 여러 상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진주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정확히 보여준다. 진주상무사는 상공회의소가 생기기 전 보부상과 시장 상인의 이익을 대변하던 조직이었고, 그 전통은 지금도 중앙시장 골목 안에 남아 있다.
이 상인의 유전자는 근대 들어 기업가의 유전자로 이어졌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앞 지수초등학교는 1921년 개교 이래 삼성 이병철과 LG 구인회를 비롯해 한국 산업화를 이끈 여러 기업인을 배출한 학교로 알려져 있다. 구인회는 승산마을에서 자랐고, 의령 출신 이병철은 누님이 시집온 승산마을에 머물며 이 학교를 다녔다. 이후 범 LG·GS·LS가의 여러 기업인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이병철과 구인회 등이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는 학교 앞 소나무는 지금 ‘부자소나무’로 불리고, 폐교된 학교 건물은 2022년 K-기업가정신센터로 다시 문을 열었다. 상업이 천시되던 시대에도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교육에 투자했던 지역의 문화가 한국 산업화의 뿌리 하나를 이곳에 심어놓은 셈이다.
진주편이 짚어보려는 것이 바로 그 힘이다. 진주는 서부 경남을 아우르는 생활권의 중심이다. 도농통합 이후 30여 년 동안 33만~35만 명대를 지켜온 드문 지방 중견도시이기도 하다. 2020년 이후 인구가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2025년 말에도 33만 5,939명을 유지한다. 조선시대 웅주거목의 위상, 지금도 작동하는 여섯 앵커, 그 중심성이 흔들리는 지점, 그리고 이를 다시 강화할 방법을 차례로 살펴보면 ‘정돈되고 단아하며 콤팩트하다’는 이 도시의 인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가 드러난다.
진주는 지리산과 남해 바다 사이, 남강이 만든 비옥한 평야 위에 자리한 고을이다. 995년 고려 성종 때 처음 ‘진주’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고려시대 이후 진주목으로 자리 잡으며 서부 경남의 중심 고을로 성장했다. 지리산의 목재와 약재, 남해의 어물과 소금, 남강 유역 평야의 곡물이 진주로 모여들었다. 산과 바다와 들을 잇는 교역의 결절점이었다.
그보다 더 무거운 위상은 군사에서 나왔다. 진주성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설치돼 경상도를 좌·우로 나눈 군사체계에서 서부 경남 일대의 방어를 담당했다. 진주목사는 진주진관의 병마첨절제사를 겸했으며, 진주진관은 곤양·사천·남해·하동·단성·삼가·의령·함안 등 서부 경남 여러 고을을 관할했다. 시기에 따라 관할 군현에는 변화가 있었지만, 오늘날 진주 생활권과 상당 부분 겹치는 넓은 배후지가 일찍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조직돼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정·군사적 중심성은 주변의 물산과 사람이 진주로 모이는 장시와 상업의 발달을 뒷받침했다.
진주는 학문의 중심이기도 했다. 조식(1501~1572)은 합천에서 태어나 만년에 지리산 자락 산청 덕산에 자리 잡고 학문에 전념했다. 호가 남명(南冥)이었던 그의 문하에서 곽재우와 정인홍을 비롯한 많은 제자가 배출돼 남명학파라는 학맥을 형성했다. 벼슬보다 실천을 중시한 그의 학풍은 임진왜란 때 많은 문하생이 의병장으로 나서면서 행동으로 이어졌다. 진주는 남명학파의 본거지인 지리산권과 가장 가까운 큰 도시이자 그 학문과 인적 네트워크가 모이는 중심지였다.
성 안의 촉석루 역시 이러한 위상을 상징한다. 고려 고종 때 처음 세워진 촉석루는 평상시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과거시험을 치르는 공간으로,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휘하는 군사 공간으로 쓰였다. 행정과 군사, 학문과 문화가 한 장소에 겹쳐 있던 것이다.
이 위상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진주의 정신적 자산으로 굳어졌다. 1592년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대규모 왜군을 물리쳤고, 이듬해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김천일을 비롯한 관군과 의병, 백성이 최후까지 항전했다. 논개가 의암에서 왜장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이 전투에서 나왔다.
진주에는 당시 군사 신호와 성 안팎의 연락을 위해 남강에 등을 띄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기억은 훗날 진주남강유등축제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가 됐다. 여기에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한 부보상 조직과 진주교방에서 전승된 예술문화가 더해졌고, 근대에는 경상남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행정 중심지의 지위까지 이어갔다. 병영과 학문, 장시와 행정이라는 여러 기능이 겹치면서 진주는 서부 경남 최대의 도시로 자리 잡았다.
이 오랜 위상은 지금도 여섯 개의 앵커를 통해 작동한다. 교통에서는 진주를 지나는 동서축과 남북축이 교차한다. 철도에서는 경전선이 동쪽으로 창원·부산, 서쪽으로 광양·순천을 연결하고, 도로에서는 남해고속도로가 같은 동서축을 형성한다. 여기에 대전에서 진주를 거쳐 통영으로 이어지는 통영대전고속도로가 남북축을 만든다. 남부내륙고속철도가 완성되면 김천에서 합천과 진주를 거쳐 고성·통영·거제로 이어지는 새로운 철도 남북축까지 더해진다. 동서로는 부산·창원과 광양·순천, 남북으로는 대전·수도권과 사천·남해안으로 연결되는 진주는 서부 경남의 교통 결절점이다.
행정과 사법 기능도 행정구역을 넘어선다. 경상남도청 서부청사는 서부 경남의 균형발전을 위해 설치된 도청의 지역 행정거점으로, 농정·환경·산림과 지역개발 등 서부 경남과 밀접한 도정 기능을 수행한다.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은 진주·사천·산청·하동·남해를 관할하며 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 역시 같은 5개 시군을 관할한다. 조선시대 진주를 중심으로 조직됐던 서부 경남의 공간질서가 범위와 기능을 달리하면서 오늘날 행정·사법권역에서도 나타나는 셈이다. 도청 소재지는 아니지만 진주가 여전히 주변 시군의 행정·사법 수요를 끌어당기는 생활권 중심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교육은 진주의 오래된 앵커다. 1925년 문을 연 진주고와 진주여고의 전신은 지역 유지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추진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후 진주는 주변 지역의 학생들이 모여드는 교육 중심지로 성장했다. 한약업으로 번 재산을 교육과 문화에 환원한 김장하가 설립한 명신고 역시 이런 전통을 보여준다. 오늘날 그 중심에는 경상국립대학교가 있다. 옛 경상대학교와 경남과학기술대학교가 2021년 통합해 출범한 국가거점국립대학으로, 2만 명이 넘는 학생과 생명과학·기계·항공 분야의 연구 역량을 갖추고 있다. 지수초등학교에서 진주고·진주여고와 명신고, 경상국립대에 이르는 교육의 축적은 진주가 오랫동안 서부 경남의 인재를 모으고 길러온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산업에서는 혁신도시와 우주항공산업이 새로운 축으로 등장했다. 2007년 착공해 LH를 비롯한 11개 공공기관이 이전한 진주혁신도시는 연구와 행정 인력을 진주에 끌어들였다. 경상국립대 위성시스템핵심기술연구센터가 개발에 참여해 2025년 발사에 성공한 초소형 인공위성 ‘진주샛’은 새로운 산업 가능성을 상징한다. 인접한 사천의 KAI를 비롯한 항공산업 생산기반과 결합하면 진주와 사천은 교육·연구와 생산을 나누어 맡는 하나의 우주항공 생활권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100년 역사에 한때 전국 실크 생산량의 80퍼센트를 차지했던 진주실크 산업이 전통 산업의 축으로 남아 있다.
상업 중심성은 더욱 분명하다. 중앙시장·논개시장·장대시장·로데오거리·중앙지하도상가·청과상점가가 원도심에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 2007년 문을 연 갤러리아백화점 진주점은 개점 당시부터 진주뿐 아니라 사천·통영·거제와 광양·순천까지 배후상권으로 설정했다. 백화점 하나만 보더라도 진주의 소비 중심성이 시 경계를 넘어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지막은 문화와 시민슬롯다. 진주성과 남강이라는 강력한 물리적 중심 위에 국가무형유산 진주검무와 진주삼천포농악, 진주오광대와 교방예술이 축적됐고, 진주는 2019년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 공예와 민속예술 분야에 가입했다. 1949년 영남예술제로 출발해 대한민국 종합예술축제의 효시로 꼽히는 개천예술제와 진주남강유등축제도 이 문화적 중심성을 해마다 도시 공간에서 다시 구현한다.
진주의 문화력은 축제와 문화재에만 있지 않다. 1909년 지역 유지와 상공인들이 힘을 모아 창간한 경남일보는 한국 최초의 지방신문으로 평가되고, 1923년에는 신분차별 철폐를 요구한 형평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해방 이후에는 1947년 설립된 진주 YMCA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지역의 공론장과 공동체 활동을 이어왔다. 김장하가 한약업으로 번 재산을 교육·문화·인권과 시민슬롯에 돌려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이 전통을 이어가는 대표적인 로컬 브랜드가 진주문고다. 바카라을 파는 서점에 머물지 않고 지역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고 강연과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의 지적·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남명의 실천적 선비정신에서 상무사의 상인정신, 형평운동의 시민정신, 김장하의 직업윤리와 진주문고에 이르기까지 진주에는 지역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온 문화가 흐르고 있다.
이처럼 앵커가 두터운 도시지만 진주가 마주한 도전도 뚜렷하다. 가장 오래된 상실은 행정 중심지 지위의 축소다. 1924년 12월 경상남도청의 부산 이전이 결정됐고, 진주부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25년 4월 도청은 부산으로 옮겨갔다. 이후 도청은 1983년 다시 창원으로 이전했다. 도청 소재지로서 누리던 위상을 내준 지 10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지역 정치권에서 도청 환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 상실이 도시의 자의식에 얼마나 깊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는 실크산업의 쇠퇴다. 한때 149개에 이르던 실크 업체는 중국산 저가 물량 공세와 국내 양잠산업의 위축이 겹치며 60여 개로 줄었다. 2010년 조성된 진주실크전문농공단지와 한국실크연구원이 산업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지만 가동률과 새로운 시장 개척은 여전히 과제다. 100년 산업의 기술과 인력이 사라지기 전에 패션·공예·디자인 산업과 연결해 새로운 진주실크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도시 구조의 다핵화다. 진주의 중심은 서쪽의 평거동에서 원도심, 상대동 시청권을 거쳐 동쪽의 충무공동 혁신도시까지 이어지는 동서축을 따라 분산돼 있다. 1990년대 평거동 신도시와 경상대 주변 신시가지가 성장했고, 시청이 상대동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행정 중심이 형성됐다. 이후 충무공동에 혁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공공기관과 새로운 주거·상업 기능이 다시 동쪽으로 확장됐다. 이 압력 속에서도 진주성 인근 중안동에 가로수길 카페거리가 형성된 것은 원도심이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힘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다. 문제는 평거동–원도심–시청권–혁신도시가 하나의 동서 도시축을 이루면서도 각각 별개의 중심처럼 움직인다는 데 있다.
네 번째 도전은 골목 자산의 공백이다. 진주의 문제는 문화유산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유산은 넘치지만 그것들이 도시의 일상 공간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전주와 경주가 한옥마을과 황리단길 같은 골목상권을 축으로 역사문화와 상업을 결합한 것과 달리, 진주에는 이에 견줄 만한 한옥 밀집 골목이나 역사문화 상권이 없다.
진주성과 촉석루라는 강력한 점(點)의 유산은 있지만 그곳에서 시장과 골목, 공예점과 음식점으로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가는 면(面)의 문화공간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진주를 찾은 사람이 진주성을 보고 유등축제를 즐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가 오늘의 도시생활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걸어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진주의 가장 큰 문화적 과제는 새로운 랜드마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자산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는 일이다.
진주시는 ‘100만 생활권 부강진주’를 내세우며 진주가 그리는 판을 서부 경남 전체로 넓혀 잡고 있다. 원도심 재도약과 우주항공산업 육성, 수도권 공공기관 2차 이전 유치 등이 그 비전을 채우는 사업들이다. 이 비전이 실제로 진주의 중심성을 강화하려면 네 가지 과제가 중요하다.
첫째는 문화력을 지역산업으로 만드는 일이다. 진주가 쌓아온 문화 자산은 강릉의 단오제, 안동의 하회탈춤과 국제탈춤페스티벌, 전주의 판소리에 견줄 만큼 두텁다. 문제는 그것을 담아낼 일상적인 도시 공간이다. 가능성은 공예와 미식에서 찾을 수 있다. 진주는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 공예와 민속예술 도시이고 소목과 실크를 비롯한 공예 전통도 가지고 있다. 공예 작업실과 상점, 전시 공간을 원도심 골목에 응집시키면 한옥마을과는 다른 진주만의 문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진주비빔밥은 일제강점기 잡지에 이미 지역 대표 음식으로 소개됐을 만큼 역사가 오래됐고 진주냉면과 교방음식도 독자적인 음식문화를 형성한다. 공예와 미식을 중앙시장과 진주성, 가로수길을 잇는 하나의 보행 동선에 배치한다면 진주는 한옥마을 없이도 자신만의 문화적 구심력을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주나 경주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진주다운 골목’을 만드는 일이다.
둘째는 평거동–원도심–상대동 시청권–혁신도시로 이어지는 동서 도시축을 연결하는 일이다. 네 지역은 서로 경쟁하는 중심이 아니라 역할이 다른 도시 자산으로 볼 필요가 있다. 평거동에는 소비력과 새로운 골목문화, 원도심에는 역사와 시장·문화, 상대동에는 시청을 중심으로 한 행정·업무 기능, 혁신도시에는 공공기관과 전문 인력이 집적돼 있다. 진주문고가 평거동에서 대표적인 로컬 브랜드이자 문화 앵커로 성장한 것처럼 각 중심의 자원을 연결하는 로컬 브랜드와 문화 콘텐츠를 키워야 한다. 평거동의 생활문화, 원도심의 역사·상업, 상대동의 행정·업무, 혁신도시의 전문 인력이 서로 연결되면 다핵화는 약점이 아니라 도시의 다양성이 될 수 있다.
셋째는 주변 지역과의 생활권 연계를 강화하는 일이다. 1999년부터 2011년까지 시행된 광양만·진주권 광역개발계획은 진주와 사천을 연담개발하고 하동·남해까지 포괄하는 서부 경남 거점도시권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오늘날 우주항공산업만 보더라도 생산기반은 사천에 강하고 대학과 연구, 주거와 상업 기능은 진주에 강하다. 산청·하동·남해 역시 의료와 교육, 쇼핑 등 여러 생활 기능에서 진주와 연결된다.
따라서 행정구역을 합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존재하는 진주–사천과 서부 경남의 생활권을 강화하는 일이다. 산업 시설은 주변 지역에 있어도 인재와 기업인이 교육과 의료, 문화와 소비를 위해 진주를 찾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면 진주는 산업의 중심을 독점하지 않고도 생활권 전체가 기대는 중심으로 남을 수 있다. 이것이 중견도시 진주에 더 현실적인 중심성이다.
넷째는 경상국립대학교의 위상 제고다. 경상국립대는 국가거점국립대학이지만 부산대·경북대·전남대·충남대 등 다른 거점국립대학에 비해 전국적인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우주항공산업이다. 경상국립대는 2023년 교육부 글로컬대학30에 선정돼 우주항공·방산 분야를 핵심 특성화 영역으로 키우고 있다. 우주항공대학과 관련 연구기관, 진주샛, 사천의 KAI와 우주항공산업 기반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 ‘GNU’를 우주항공 특성화 대학으로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지역 대학의 경쟁력은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이 전국에서 학생과 연구자를 끌어오면 도시의 인구와 소비가 늘고 기업이 들어올 이유가 생긴다. 산업이 성장하면 다시 대학의 연구와 취업 경쟁력이 높아진다. 대학과 산업이라는 두 앵커가 서로를 끌어올리는 선순환을 만드는 것이 진주가 서부 경남의 인재 중심지로 남는 길이다.
상인의 도시가 지켜온 것은 결국 물건을 사고파는 능력만이 아니었다. 사람과 물자가 어디에서 만나야 하는지를 알고, 흩어진 자원을 한 곳에 모아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능력이었다. 남명학파와 조선시대 장시에서 진주상무사로, 승산마을의 기업가에서 형평운동과 김장하의 직업윤리, 오늘의 중앙시장과 진주문고에 이르기까지 지역을 스스로 지탱하려는 감각은 형태를 바꾸며 이어져 왔다.
지방 도시의 중심성도 결국 같은 능력에서 나온다. 모든 것을 혼자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과 자원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진주가 원도심의 문화와 상업을 되살리고, 평거동과 혁신도시를 연결하며, 사천을 비롯한 서부 경남과의 생활권을 더 촘촘하게 엮어낸다면 진주는 산업 규모나 행정 지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중심도시로 남을 수 있다. 진주 상인의 오래된 감각이야말로 이 도시가 다시 꺼내 써야 할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