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중견도시를 다니다 보면 원도심이 쇠퇴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도시가 커지면서 시청이 신시가지로 옮겨가고, 철도역이 외곽으로 이전하고, 대학과 버스터미널도 기존 중심부를 떠났다. 여기에 법원과 검찰청, 병원과 상업시설까지 이동하면 원도심은 사람을 끌어들이던 기능을 하나씩 잃는다. 원도심 쇠퇴는 상권의 문제이기 이전에 중심 기능의 이탈 문제인 경우가 많다.
순천은 다르다. 시청을 옮기지 않았고, KTX가 정차하는 순천역도 기존 도심에 남아 있다. 국립순천대학교와 종합버스터미널 역시 원도심과 연결된 기존 시가지에 자리한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조례동과 신대지구 같은 새로운 주거·상업지역이 만들어졌지만 도시를 움직이는 핵심 시설을 새로운 중심지로 한꺼번에 이전하지 않았다. 시청·철도역·대학·버스터미널을 기존 중심시가지에 함께 유지한 중견도시는 드물다.
지역생활권 차원에서도 중심 기능을 비교적 고르게 지켰다. 행정·사법, 교육, 의료, 상업, 산업·일자리, 교통이라는 주요 앵커가 여전히 순천에 집적돼 있다. 시청·역·대학·터미널이 도시 내부의 구심력을 유지했다면, 이들 앵커는 순천이 주변 지역에 제공하는 중심 기능을 유지하게 했다. 도시 내부의 중심과 지역생활권의 중심이 겹쳐 있는 것, 이것이 순천의 중요한 특징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순천 양옆에 여수와 광양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수는 석유화학과 항만, 광양은 철강과 항만이라는 강력한 산업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순천은 두 산업도시의 배후도시로 밀려나지 않았다. 왜 순천은 중심을 지킬 수 있었을까. 그 출발점은 최근의 국가정원이나 문화콘텐츠산업이 아니다. 다른 지역생활권 중심도시와 마찬가지로 순천의 원형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
1413년 순천은 순천도호부가 됐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순천도호부에는 여수·돌산·부유의 세 속현이 있었다. 여수와 돌산은 오늘날 여수 지역에 해당하고 부유는 순천 지역의 옛 고을이었다. 광양현과 낙안군, 보성군, 고흥현 등은 별도의 군현이었다. 오늘날 전남 동부 전체가 순천도호부의 직접 관할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순천은 넓은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전남 동부의 중요한 행정 중심지였다.
근대에는 철도가 이 오래된 중심성 위에 새로운 기능을 얹었다. 전라선과 경전선의 철도망이 순천에서 만나면서 순천은 행정 중심지에서 교통 중심지로 확장됐다. 사람이 모이자 학교와 병원, 시장과 상점이 뒤따랐다. 조선시대에 형성된 행정 중심성 위에 근대의 교통과 상업, 교육과 의료 기능이 차례로 집적된 것이다.
이 구조는 산업화 이후 국가의 공간계획에도 나타났다. 1982년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전국을 28개 지역생활권으로 나누었는데, 순천은 17개 지방도시생활권 가운데 하나의 중심도시였다. 당시 행정구역으로 순천생활권은 순천시·여수시와 구례군·광양군·여천군·고흥군·보성군·승주군, 모두 2시 6군으로 구성됐다. 오늘날의 순천·여수·광양뿐 아니라 구례·고흥·보성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전남 동부 생활권이었다.
조선시대 순천도호부의 영역과 1982년 순천생활권의 영역이 같았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순천이 주변 지역에 행정·교통·교육·의료·상업 서비스를 공급하는 중심지 역할을 반복해서 수행했다는 점이다. 행정구역은 달라졌지만 중심성은 이어졌다.
198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됐다. 여수의 석유화학산업과 광양제철소가 성장하면서 산업 중심성에서는 여수와 광양이 순천보다 강해졌다. 그러나 산업 중심성과 생활 중심성은 같지 않았다. 여수와 광양이 생산과 일자리의 중심으로 성장하는 동안 순천은 교육·의료·상업·문화와 주거가 집적된 생활 중심지의 역할을 유지했다.
오늘날 순천의 특징은 이러한 역사적 중심성이 여러 앵커를 통해 여전히 작동한다는 데 있다. 행정에서는 순천시청을 중심으로 공공기능이 유지되고, 사법에서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과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이 전남 동부의 광역적 기능을 담당한다. 교육에서는 국립순천대학교가 대표적인 고등교육 앵커다.
의료와 상업 역시 순천 시가지에 집적돼 주변 지역의 수요를 끌어들인다. 교통에서는 KTX 순천역과 종합버스터미널, 도로망이 전남 동부의 결절점 역할을 한다. 순천시의 현재 버스망에서도 순천대·시청·중앙시장·종합버스터미널·순천역이 하나의 기존 시가지 축으로 연결돼 있다.
산업은 순천의 약점이자 새로운 가능성이다. 순천이 여수의 석유화학이나 광양의 철강을 따라갈 이유는 없다. 순천시가 새롭게 육성하는 산업은 애니메이션·웹툰을 중심으로 한 문화콘텐츠산업이다. 2025년 원도심 애니메이션·웹툰 클러스터에 애니메이션 11개사, 웹툰 6개사 등을 포함한 콘텐츠기업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입주 확정 기업이 30개사로 늘었다. 2026년에도 추가 기업 모집이 이어지고 있다. 순천시는 이를 단순 기업유치가 아니라 원도심의 콘텐츠 창작·제작 생태계 구축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는 갑자기 등장한 산업도 아니다. 순천대학교에는 만화·애니메이션 분야의 교육 기반이 있었고, 순천시는 오래전부터 웹툰 창작과 인재 육성을 지역의 새로운 콘텐츠 기반으로 모색해 왔다. 2010년대 원도심 도시재생 계획에도 웹툰 창작센터와 대학 인력을 연계하려는 구상이 이미 등장한다.
순천의 또 하나의 강력한 앵커는 문화다. 순천만과 국가정원이라는 전국적인 자산이 있고, 원도심에는 향동 문화의 거리와 중앙동·남내동, 조곡동 철도관사마을과 로컬 크리에이터가 있다. 특히 국가정원은 중앙정부가 기획한 사업을 순천이 유치한 것이 아니라, 순천시가 순천만 보전과 도시발전을 연결하는 전략으로 국제정원박람회를 스스로 기획하고 추진해 성공시킨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의 성공은 ‘정원의 도시 순천’으로 이어졌고, 2015년에는 순천만정원이 대한민국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됐다. 이후 다른 지자체들이 정원도시와 정원박람회에 뛰어들 정도로 전국적인 모델이 됐다. 지방정부가 지역의 자연자산을 스스로 발견하고 새로운 도시전략으로 발전시킨 보기 드문 자발적 혁신 사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뿌리 깊은 나무』를 만든 한창기가 있다. 그는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잡지와 바카라, 디자인을 통해 동시대의 콘텐츠로 번역했다. 낙안읍성 인근의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은 지금도 그 유산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다.
순천만을 국가정원으로 확장한 일, 한창기가 전통문화를 현대적인 콘텐츠로 번역한 일, 오래된 원도심에 로컬 크리에이터와 애니메이션·웹툰 기업을 불러들이는 일에는 공통된 문법이 있다. 이미 있는 자연과 문화, 장소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새로운 콘텐츠로 바꾸는 힘이다. 이것이 순천다움이다.
순천도 안심할 수는 없다. 첫 번째 도전은 여수와 광양의 자족성 강화다. 산업뿐 아니라 상업·교육·의료·문화 등 생활서비스가 성장하면서 두 도시가 스스로 제공하는 기능도 많아지고 있다. 과거에 형성된 순천의 생활권 중심성이 저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도전은 도시가 가진 콘텐츠의 공간적 분산이다. 국가정원, 저전동 정원마을, 향동 문화의 거리, 중앙동·남내동, 조곡동 등 각 지역에 좋은 자산이 있지만 하나의 도시 경험과 경제 생태계로 충분히 연결돼 있지는 않다. 국가정원을 찾은 사람이 원도심으로 이동하고, 원도심의 문화와 상업을 경험한 뒤 다른 동네까지 찾아가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새롭게 들어오는 애니메이션·웹툰 산업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원도심 건물에 기업을 입주시킨다고 해서 곧바로 도시의 산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과 대학, 창작자, 상인, 주민이 연결되고 콘텐츠가 거리와 상점, 상품과 축제로 흘러나와야 한다. 순천시도 원도심의 기존 건물을 활용해 콘텐츠기업을 입주시키면서 ‘콘텐츠 창·제작기지’를 조성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순천의 문제는 새로운 사업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국가정원, 정원마을, 원도심 문화자산, 로컬 크리에이터, 대학, 애니메이션·웹툰 기업이라는 좋은 자산이 이미 많다. 순천의 과제는 중심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지켜온 중심과 흩어진 자산을 연결해 새로운 경제를 만드는 것이다.
순천의 중심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공간적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 콘텐츠를 동네의 일상으로 가져오고, 원도심을 지역경제의 생산거점으로 전환하며, 그 중심성을 여수·광양을 포함한 지역생활권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첫째는 콘텐츠를 동네로 가져오는 것이다. 국가정원이 도시를 대표하는 거대한 정원 콘텐츠라면 저전동 정원마을은 정원을 골목과 주거, 주민의 일상으로 가져오는 실험이다. 이제 정원을 관광 콘텐츠에 머물게 하지 않고 하나의 생활문화와 산업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정원문화는 조경·가드닝 서비스뿐 아니라 식물과 화훼, 정원용품과 가구, 원예교육, 정원 디자인, 정원형 카페와 숙박 같은 다양한 정원산업을 파생시킬 수 있다. 정원마을은 이런 상품과 서비스를 실제 생활공간에서 실험하고 판매하는 작은 생산거점이 될 수 있다.
애니메이션·웹툰도 마찬가지다. 기업을 원도심 건물에 입주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거리와 상점, 공공공간, 상품, 전시, 교육, 축제와 연결해야 한다. 순천시는 이미 애니메이션·웹툰 제작기업을 대상으로 파일럿 제작과 사업화를 지원하고 있다. 정원이 생활문화에서 정원산업으로 확장되듯 애니메이션·웹툰도 동네에서 보고, 사고, 만들고, 즐기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 결국 순천의 과제는 정원과 애니메이션·웹툰이라는 두 콘텐츠를 도시의 일상과 산업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둘째는 원도심을 거점경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순천은 이를 실험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시청과 KTX역, 대학과 버스터미널이라는 도시의 핵심 시설이 기존 시가지에 남아 있고, 향동 문화의 거리와 중앙동·남내동, 조곡동과 옥천, 오래된 건축물과 골목이라는 공간 자산도 있다. 여기에 로컬 크리에이터와 애니메이션·웹툰 기업이라는 새로운 생산 주체가 들어오고 있다.
따라서 목표를 상권활성화보다 크게 잡아야 한다. 원도심을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유통공간에서 콘텐츠와 로컬 브랜드, 기업이 계속 태어나는 생산거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애니메이션·웹툰 기업, 정원산업, 로컬 브랜드, 예술가와 창작자, 기존 상인이 서로 연결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업과 기업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특정 거리나 몇 개 거점에 사업을 한정하지 않고 원도심 전체를 하나의 사업 대상으로 설정해야 한다. 원도심 거점경제는 개별 상권을 활성화하는 사업이 아니라 원도심 전체의 생산 생태계를 구축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 위에서 건축환경, 문화콘텐츠, 창업생태계, 인재공급의 4대 사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첫째, 건축환경에서는 오래된 건물과 빈 점포를 창작자와 기업의 공간으로 재생하고, 골목과 가로를 보행자와 창작자 친화적으로 개선하는 건축마을을 만든다. 둘째, 문화콘텐츠에서는 국가정원과 정원마을, 지역문화와 애니메이션·웹툰을 연결해 순천에서만 생산할 수 있는 콘텐츠를 키운다. 셋째, 창업생태계에서는 로컬 크리에이터와 콘텐츠 기업, 기존 상인이 새로운 브랜드와 기업을 만들 수 있도록 창업·제작·유통의 기반을 구축한다. 넷째, 인재공급에서는 순천대학교와 지역슬롯를 연결하고 로컬스쿨과 메이커스페이스를 통해 창작자와 창업자를 지속적으로 길러낸다.
중요한 것은 네 사업을 따로 추진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공간이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않고, 인재가 있어도 창업과 생산 공간이 없으면 지역에 머물기 어렵다. 건축환경이 공간을 제공하고, 문화콘텐츠가 순천다운 생산물을 만들며, 창업생태계가 이를 기업으로 키우고, 인재공급이 그 과정을 지속시키는 구조가 필요하다. 상인·건물주·로컬 크리에이터·콘텐츠 기업·대학·주민·행정을 연결하는 원도심 거버넌스는 이 네 사업을 묶는 운영체계가 된다.
순천은 이런 의미에서 원도심 거점경제의 좋은 테스트 케이스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지방 원도심 정바카라이 도시재생과 상권활성화, 관광객 유치에 집중했다면 순천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원도심을 지역경제의 생산거점으로 만드는 모델을 실험할 수 있다. 쇠퇴해 중심 기능을 모두 잃은 원도심에 새로운 산업을 억지로 심는 것이 아니다. 이미 시청·KTX역·대학·버스터미널과 생활권의 주요 앵커를 지킨 중심부에 새로운 생산 기능을 더하는 전략이다. 실제로 순천시가 원도심의 기존 건물을 활용해 애니메이션·웹툰 기업을 집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실험은 이미 시작됐다.
셋째는 여수·순천·광양의 생활권을 더욱 촘촘하게 연결하는 것이다. 순천이 여수의 석유화학이나 광양의 철강을 가져올 필요는 없다. 세 도시의 차이를 활용하는 편이 낫다. 여수의 석유화학·항만·관광, 광양의 철강·항만에 순천의 교육·의료·상업·문화·주거, 그리고 정원산업과 문화콘텐츠산업을 결합하면 개별 도시가 모든 기능을 갖추려고 경쟁하는 것보다 강한 지역생활권을 만들 수 있다.
행정통합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생활권의 연결이다. 교통뿐 아니라 교육·의료·문화·주거와 창업에서 세 도시 사이의 이동과 교류를 쉽게 만들어야 한다. 여수와 광양의 산업과 일자리, 순천의 생활서비스와 새로운 창조산업이 연결될수록 세 도시의 분업구조도 강해진다.
순천은 중심을 잃은 도시가 아니다. 산업도시 사이에서 생활과 문화의 중심을 지켜낸 드문 중견도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중심성을 새로운 경제로 확장하는 일이다. 정원과 애니메이션·웹툰을 동네의 일상과 산업으로 만들고, 원도심을 콘텐츠와 브랜드와 기업이 태어나는 생산거점으로 전환하며, 여수·광양과 더 촘촘한 생활권을 만드는 것.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힘, 그것이 순천이 지켜온 순천다움이며 앞으로 더욱 강화해야 할 순천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