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것이 일이 된다
“Do what you like. Like what you do.”
Life is Good 긍정주의(Optimism)의 힘을 전파하는 미국의 유명 캐주얼 의류 및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에 슬로건이다.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안에는 쉽게 식지 않는 애정과 열정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금씩 잘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간과 상황이 잘 맞아떨어지면 그것이 직업이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이 그랬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즐거웠고,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공부하게 되었다.
디자인학과 입시를 준비하면서 데생과 구성을 배웠고, 대학에서는 타이포그래피, 제품디자인, 금속공예, 사진, 광고디자인, 도예, 동양화, 설치미술 등 정말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비교적 새로운 디자인 관련 학과였기 때문에 여러 분야의 전문 강사님들에게 다양한 디자인 영역을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한 분야만 깊게 파고들기보다 디자인이라는 커다란 세계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원에서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났다.
Computer Art, Multimedia, 3D, Interactive Design 등을 공부했다.
졸업작품으로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용 CD-ROM과 Product Branding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CD-ROM이라는 단어 자체가 참 오래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최신 기술과 디자인이 만나는 아주 흥미로운 분야였다.
그리고 대학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나는 취업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포트폴리오를 쉽게 공유하거나 LinkedIn에서 채용공고를 찾아 지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을 선택했다.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
Kinko’s에서 출력한 내 작품들을 포트폴리오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샌프란시스코의 Top 20 디자인 회사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아 프린트했다. 그렇게 무작정 회사를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내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나를 소개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을까 싶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간절했고 젊었다.
디자인 회사의 문을 열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떤 회사에서는 아예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차갑지는 않았다.
어떤 회사에서는 젊은 동양인 여학생이 신기했는지 따뜻한 커피를 건네주며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내 연락처와 포트폴리오를 놓고 가라고도 했다.
어느 날에는 한 회사의 Art Director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나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따뜻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내 포트폴리오도 직접 봐주셨다.
그리고 회사의 정식 채용 사이트를 통해 지원하는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주셨다. 나는 그렇게 여러 디자인 회사를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샌프란시스코 디자인 회사들의 규모와 분위기, 사무실의 모습, 디자이너들이 일하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현업 디자이너들이 실제로 어떤 환경에서 어떤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사용하며 디자인을 하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살아 있는 디자인 교육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학교에서 디자인을 배웠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현장에서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얼마 후부터는 회사 홈페이지의 채용 페이지를 통해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미국 학생들에게는 없는 커다란 장벽이 하나 있었다.
비자.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던 나에게 취업비자와 스폰서 문제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현실적인 벽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쉽게 인터뷰 기회를 얻는 동안, 나는 인터뷰를 한 번 얻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 지원했다. 계속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BlueWave Communications라는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내 포트폴리오에 있는 Interactive / Kiosk UI Design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다며 인터뷰를 요청해 온 것이다. 나는 인터뷰를 위해 곧바로 회사로 달려갔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디자인 매니저 중 한 분이 내가 졸업한 Academy of Art University의 동문이셨다. 게다가 중국계 미국인이셨다.
그분은 내 포트폴리오를 아주 관심 있게 봐주셨다.
특히 당시 새로운 클라이언트들이 원하고 있던 Interactive와 Kiosk 관련 프로젝트 경험이 있다는 점에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내게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대학원 졸업 후 주어진 1년 동안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이후 정식 직원으로 전환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유학생이었던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어쩌면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기회를 너무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인터뷰를 한 그 자리에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주,
드디어 나는 꿈에 그리던 디자이너가 되었다.
3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첫 출근날을 기억한다.
그날의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드디어 내가 디자이너가 되었다’는 그 벅찬 마음. 그때는 몰랐다. 그 첫 온라인 게임이 내 디자인 인생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작은 시작이 훗날 30년이 넘는 나의 디자인 여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