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온라인 게임 그리고 한 장의 슬라이드
나의 첫 온라인 게임 그리고 한 장의 슬라이드
1997년, 샌프란시스코 Academy of Art University를 졸업하고 처음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나의 첫 온라인 게임은 샌프란시스코 Market Street에 있던 BlueWave Communications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은 내가 앞으로 어떤 디자이너가 될지 방향을 잡아준 아주 중요한 첫 온라인 게임이었다.
당시는 실리콘밸리의 인터넷과 IT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기업들의 IPO와 투자 유치가 활발했고, 투자자와 애널리스트들에게 회사를 소개하기 위한 Investor Presentation과 Corporate Presentation이 쏟아져 나왔다.
BlueWave는 이런 기업들의 Financial Communication과 Investor Presentation을 제작하는 금융·IR 분야의 디자인 파트너 회사였다.
당시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던 여러 테크 기업들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기업의 복잡한 Financial Data와 Business Information을 디자인으로 정리하고 시각화하는 일을 배웠다.
지금처럼 Figma도 없었고 Digital Design System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PowerPoint, Photoshop, Illustrator 같은 툴을 사용해 하나의 슬라이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야 했다.
내가 담당했던 일은 단순한 그래픽 디자인에 그치지 않았다. Investor Presentation과 Corporate Presentation을 디자인하고, 기업의 투자자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Visual System을 만들기도 했다. 전시와 홍보 공간에서 사용되는 Interactive Kiosk와 다양한 Digital Multimedia 작업도 했다.
대학원에서 배웠던 Computer Art, Multimedia, 3D, Interactive Design이 이때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처음에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다.
한 장의 슬라이드에도 그 회사를 대표하는 수많은 의미가 담길 수 있다는 것.
숫자 하나, 그래프 하나, 문장 하나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같은 정보도 전혀 다르게 보였다. 무엇을 먼저 보여줄 것인지, 무엇을 강조할 것인지, 복잡한 내용을 어떻게 단순하게 만들 것인지, 그리고 그 모든 정보를 어떤 흐름으로 보여줘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지.
그것 역시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슬라이드를 그냥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장 안에 회사의 이야기와 메시지를 담는 연습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배운 Presentation Design은 훗날 나에게 아주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삼성에서 컨설팅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Cisco에서 임원들에게 디자인과 프로젝트를 설명할 때도 그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복잡한 내용을 단순하게 만들고,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구조화하고,
한 장의 화면만으로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
그때는 그저 한 장의 슬라이드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나는 그 한 장을 디자인하면서 비즈니스를 이해하고, 사람을 설득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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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사람에게서도 배웠다
첫 온라인 게임에서의 1년은 디자인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한 시간이었다.
고생 끝에 정식으로 취업했고, 수습 시절 받던 말도 안 되는 연봉에서 벗어나 정식 타이틀과 제대로 된 연봉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1년 동안 위축되지 않으려고 했다. 언젠가는 클라이언트가 내 디자인을 좋아해 주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중국계 디자인 매니저가 내가 만든 디자인을 마치 자신의 디자인인 것처럼 클라이언트에게 발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어? 저거 내가 만든 디자인인데?’ 하지만 나는 화를 내거나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계속 제 디자인을 발표하세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클라이언트가 내 디자인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굳이 앞세우기보다 좋은 결과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그 경험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때 마음속으로 한 가지를 다짐했다.
나중에 내가 팀을 이끌게 되더라도 절대 팀원의 디자인을 마치 내가 만든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
팀원이 만든 디자인이라면 그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면 그 사람의 공로를 인정하고, 내가 발표하는 자리라 하더라도 누가 만들었는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 당연한 것을 그곳에서 배웠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나에게 단순히 디자인을 배운 시간이 아니었다.
어떤 디자이너가 될 것인가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일할 것인가를 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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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 만난 Cisco
1999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San Jose의 한 호텔에서 Cisco Systems의 기업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기 위해 2박 3일 출장을 갔다. 당시 기업 프레젠테이션 디자인은 정말 고된 일이었다.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일하는 날도 있었다.
클라이언트의 Financial Data와 Planning 자료는 계속 바뀌었다. 숫자가 바뀌면 그래픽을 다시 만들고, 내용이 바뀌면 슬라이드 전체의 흐름도 다시 손봐야 했다. 프레젠테이션 당일에는 무대 뒤에서 발표자의 신호를 보며 슬라이드를 넘겨주고, 각종 미디어 장비를 연결하고 확인하는 일까지 해야 했다.
특히 힘든 시간은 오후 5시 이후였다. 하루 종일 회의하고 발표를 준비했는데도 Financial & Planning 자료가 계속 업데이트되면서 슬라이드가 시시각각 바뀌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John이라는 클라이언트의 프레젠테이션 내용이 대폭 수정되었다. 그런데 담당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결국 막내였던 내가 대신 슬라이드를 수정하게 되었다.
문제는 장소였다. 호텔 객실도, 회의실도 아니었다. 호텔 바였다.
나는 Staff라고 적힌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바에 들어가니 아주 중후한 신사 한 분이 위스키 언더락을 마시고 계셨다. 그분이 나를 보더니 상냥하게 손을 흔들어 주셨다. 나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바 의자가 너무 높았다. 짧은 다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결국 부스터 체어에 다리를 올리다시피 하고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숫자를 확인하고, 그래프를 수정하고, 슬라이드 내용을 바꾸고, 디자인을 다시 맞췄다.
옆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그 신사분은 내가 일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는 그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당시 Cisco Systems의 CEO, John Chambers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재미있는 장면이다.
세계적인 IT 기업의 CEO가 바로 옆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고, 그 옆에는 검은색 Staff 티셔츠를 입은 막내 디자이너가 높은 바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노트북으로 슬라이드를 수정하고 있었다.
그분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직급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늦은 밤까지 일하고 있는 한 디자이너에게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27년이 지났다.
1999년의 나는 Cisco를 위해 한 장의 프레젠테이션을 만들던 디자이너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Cisco에서 17년 넘게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때는 내가 Cisco를 위해 한 장의 슬라이드를 만들고 있었고, 지금은 Cisco 안에서 수많은 디자인을 만들고 있다.
그날 밤, 내가 앞으로 Cisco라는 회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생은 참 재미있다.
한 장의 슬라이드를 만들기 위해 호텔 바에 앉아 있던 그날 밤이, 27년이 지난 지금 나의 Cisco 이야기 속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나의 디자인 인생도 결국 그 한 장의 슬라이드에서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한 장을 더 잘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고,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배우는 것.
3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다.
한 장의 디자인을 만들고,
그 안에 이야기를 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