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고독 사이 Remote Worker
2013년, 나는 Cisco Korea로 Relocate 하면서 출퇴근 대신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재택근무가 특별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상당히 낯선 근무 방식이었다. 나는 Cisco WebEx를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 본사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팀원들과 함께 일했다. 화상회의를 하고, Chat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파일을 공유하고, 때로는 전화로 이야기했다.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은 한국에 있었지만,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미국과 유럽, 아시아 곳곳에 있었다. 시간이 다르다 보니 한국 시간으로 밤 9시에 일을 시작해 새벽 4시까지 일하는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새벽 6시가 되어서야 컴퓨터를 닫았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아마 디자이너 중에서 나만큼 새벽이 밝아오는 모습을 많이 본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 같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재택근무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우와~ 회사 거저 다니네.”
“집에서 하루 종일 놀아도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야?”
재택근무를 한다고 하면 이런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재택근무는 ‘집에서 편하게 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대신, 회사와 집의 경계가 사라지는 생활이었다.
집 안에 작은 회사가 생겼다.
당시 Cisco WebEx는 나에게 단순한 화상회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화상회의뿐만 아니라 Team Space, 1:1 Message, Calling, File Sharing, Whiteboard까지 하나의 환경 안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집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글로벌 회사의 업무를 그대로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내 컴퓨터 안에 작은 회사 하나가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WebEx Chat의 Status & Availability를 보면 동료들이 지금 온라인인지, 자리를 비웠는지 알 수 있었다. 초록색 작은 점 하나가 마치 회사의 출퇴근 카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글로벌 네트워크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은 분명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업무 시스템에 접속하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회의에 들어가고, 파일을 열고, 업무를 처리하는 모든 과정이 기록되고 연결되어 있었다. 집에 있다고 해서 회사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집에 있었지만, 회사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13년이 된 지금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경험했다. 이제는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하면 대부분 이해한다. 하지만 2013년의 나는 조금 달랐다.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학부모 모임에서 재택근무를 한다고 이야기하면,
“그런 회사가 어디 있어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아파트 관리실 아저씨에게는 내가 밤새 영어 라디오를 틀어놓는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미국 본사와 일하다 보니 밤늦게 영어로 회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에는 내가 조금 다른 세상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편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재택근무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옷이었다. 출근할 필요가 없으니 어느 순간부터 아주 편한 옷을 입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문제는 가끔 회사 명함을 건네야 할 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조금 난감했다.
한 번은 삼성동에 있는 Cisco Korea 본사에 연말정산 관련 서류 때문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평소 집에서 편하게 일하던 차림 그대로였다. 인포데스크에 있던 직원들이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던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모두 정장을 입고 출퇴근하는 회사에, 캐주얼한 옷을 입은 50대 아줌마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조금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나 Cisco 직원 맞는데.’
쩝.
재택근무를 오래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일이 생겼던 시절이었다.
회사에 다니지만 회사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순간. 자유롭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다 물론 재택근무에는 분명 좋은 점이 많았다. 출퇴근 시간이 없으니 시간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편안한 환경에서 집중할 수 있었고,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혼자만의 몰입 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개인적인 일과 업무를 조금 더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했다. 동료와 우연히 마주치며 나누는 짧은 대화가 줄어들었다. 사무실에서는 커피를 가지러 가다가, 이거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런 우연한 대화 속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집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된 Meeting과 Chat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일과 삶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일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퇴근하지 않아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정말 24시간 일하는 기분이 들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웬만한 것은 모두 해결할 수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 모든 문제를 컴퓨터 앞에서 해결하려는 습관도 생겼다. 그때 나는 아직 몰랐다.
재택근무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멈추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나의 매니저였던 Dustin이 있었다. Dustin은 나와 동갑이었고 미국 Minnesota에 살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전부터 재택근무를 해왔기 때문에, 나보다 재택근무라는 생활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나를 지켜보던 Dustin이 어느 날 조언을 해주었다. 일과 삶의 경계를 분명하게 만들고, 자기 관리와 시간 관리가 재택근무에서는 특히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었다. 하루에 30분은 꼭 걸어라. 그리고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취미를 하나 가져보라고 했다. 가능하면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수업을 들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조금 의외였다. 나는 일을 더 잘하는 방법을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Dustin은 오히려 일하지 않는 시간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죽공방에 다니기 시작했다. Dustin의 조언대로 나는 매일 한 번씩 산바카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취미를 찾았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가죽공예였다. 일주일에 두 번 가죽공방에 다니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가방의 패턴을 직접 만들고, 가죽을 자르고, 펀칭을 하고, 바느질을 하고, Edge Coat를 바르는 법을 배웠다.
재료를 고르기 위해 신설동까지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던 손으로 가죽을 만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던 손이 가죽을 자르고 바늘을 잡았다.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디자이너인 나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디자인이었다. 화면 속의 디자인이 아니라 손끝으로 완성되는 디자인이었다.
가죽공예를 중급 정도까지 배우게 되었을 때는 작은 소품을 직접 만들어 미국에 있는 팀원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물론 나에게 재택근무의 균형을 가르쳐준 Dustin에게는 가장 좋은 가죽을 골랐다.
그때의 나는 아마 말로는 잘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Dustin, 당신이 가르쳐준 것은 일하는 방법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이었어요.”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어느덧 13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시대보다 조금 앞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나는 단지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혼자 일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혼자 살아가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
재택근무의 가장 큰 장점은 자유였다. 하지만 그 자유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어야 했다.
누가 출근하라고 하지 않아도 바카라상에 앉아야 하고,
누가 퇴근하라고 하지 않아도 컴퓨터를 닫아야 했다.
일을 시작하는 것도 나였고, 일을 멈추는 것도 나였다.
13년 동안 재택근무를 하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결국 일과 개인 생활의 균형, 그리고 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몸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결국 재택근무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어디에서 일하느냐보다 어떻게 일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재택근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카라상도, 컴퓨터도 아니었다.
스스로 일을 시작하고,
스스로 멈출 줄 아는 능력이었다.
아마 이것이 내가 13년 동안 Remote Worker로 살아오면서 얻은 가장 값진 배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