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선생님의 바카라장

내가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날

by디자이너민CHU

어릴 적 나는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린이 사생대회, 반공 포스터 그리기, 교내 미술대회….


대회가 열릴 때마다 나는 상을 받아 왔다. 하지만 성적 우수상이나 모범학생상은 아니었다. 언제나 미술 관련 상이었다.


친구들 부모님은 시험 성적과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지만, 우리 부모님은 조금 달랐다.


맞벌이로 바쁘셨지만 우리 삼 형제에게만큼은 배우는 기회를 아끼지 않으셨다. 미취학 시절부터 미술, 음악, 체육 등 예체능 학원을 보내 주셨고,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다. 너희는 다양한 것을 배우며 살아라."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씀이 내 인생의 방향을 만들어 준 첫 번째 디자인 철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중학생이 된 후에도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미술학원으로 향했다.


연필 데생을 하고, 수채화를 그리고, 유화를 그렸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려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나는 당연히 화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 교과서를 넘기다가 한 단어를 발견했다.


'디자인(Design)' 내가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날,

교과서에는 산업혁명 이후 디자인이 우리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공업디자인, 가구디자인, 공예디자인, 건축디자인….


그 짧은 설명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화가가 되어 전시회를 여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세상을 더 편리하게 만드는 일도 그림으로 할 수 있다고?'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는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나는 미술부장이었다.


미술 선생님이셨던 나정분 선생님은 우리 아파트 같은 동에 사셨다. 키가 크고 서구적으로 미인형의 선생님은 혼자 생활하셨는데, 거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바카라장이 늘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하셨다.


거실 바카라장에는 명화집과 동양화 서적들이 가득했다. 그것만으로도 내겐 보물창고 같았는데, 그 사이에 꽂혀 있던 몇 권의 디자인 바카라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나는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디자인이 뭐예요?"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재미있지만, 디자인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과 공간을 더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란다.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지."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꾸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께 디자인학과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서울 홍대 앞에 있던 안규환 화실에서 평면 구성과 이미지 구성 등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디자인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약 그날 미술 교과서에서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리고 정분 선생님의 바카라장이 내게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정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학생 한 명의 호기심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바카라장을 기꺼이 열어 주셨던 그 따뜻한 마음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돌아보면 나 역시 많은 지인과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알려주고 싶다.


언젠가 내가 건네는 작은 이야기 하나가 또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아마 그것이 내가 지금도 디자인하고 또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기록하고,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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