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의 전쟁

어쩌다 텃밭 5

by혜솔

어젯밤에 제주도에서 돌아와 짐도 제대로 풀지 않고 잠들었다, 아침이 되고 로리가 유치원에 가자마자 나는 텃밭으로 달려갔다. 여행 내내 제일 걱정했던 게 텃밭이었다. 며칠 전 뿌린 씨앗은 싹이 나오고 있는지 토마토는 열렸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텃밭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머, 여기 내 밭 맞아?"

긴 시간이 아닌, 닷새였다. 겨우 닷새. 그런데 밭이 아니라 초원이 되어 있었다. 아니, 초원도 아니다. 밀림 수준이었다. 내가 심은 야채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풀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매일 오전에 밭에 나가 풀을 조금씩 뽑아주고, 일부러 남겨두는 풀도 구분해 가며 키웠다. 그런데 사람 손길이 닷새 끊기자 풀들이 긴급회의라도 연 모양이다.

"이 밭주인 제주도 갔대!"

"지금이다!"

"전원 출동!"
그 결과는 이 모양이 되었다. 풀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밭을 점령했다.
상추나 바질은 구석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조난자 신세였다.
나는 장갑을 끼고 전투에 돌입했다. 탄식하며 서 있을 시간이 없다.
풀을 뽑고 또 뽑고. 허리를 펴면 다시 풀이 보이고. 돌아서면 또 풀이 보이고.
오늘 하루 종일 풀과 씨름한 끝에 남은 상추를 정리하고 흙을 뒤집어 새 밭을 만들었다. 씨앗도 다시 뿌렸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방울토마토는 예쁘게 익어 가고 옥수수도 알이 꽉 차 있었다. 주인이 없어도 자기 할 일은 착실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을 하다 보니 슬슬 하늘을 올려다보게 됐다.
"비 좀 와라."
제주도에서는 우산 들고 다니느라 팔이 아팠는데 집에 오니 텃밭에서 풀을 뽑아내느라 팔이 아프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한 일이다. 여행지에서는 비를 피하고 싶었고, 텃밭에서는 비를 기다린다.
더 웃긴 건 하늘이다. 하루 종일 잔뜩 흐려 있다가도 내가 밭에만 들어가면 해가 반짝 난다.
오늘도 그렇게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채소를 한 아름 따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텃밭 수확물로 차리면 되겠다 했는데 냉장고에서 줄어든 게 없는 걸 보니?
우리 아들과 며느리는 내가 없는 동안 집에서는 밥을 한 번도 안 해 먹었단다.
"왜?" 하고 물으니
" 엄마 안 계실 때 다이어트 좀 하려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났다.

"대신 다른 걸 먹었겠지. 다이어트는 무슨…"

"근데, 이젠 밥 먹고 싶어요" 며느리가 웃으며 얘기한다.

로리가 없으니 얼마나 할 일이 많았을까 이해는 간다.
애가 보고 싶어 눈에 삼삼하긴 했겠지만 솔직히 마음은 분주했을 것이다.

애 때문에 못하고 지나쳤던 일, 미뤄왔던 일이 왜 없겠는가.

집안에서 밥 해 먹고 있을 시간이 있겠는가.
영화 보고, 데이트하고, 외식하고.
생각해 보니 이번 휴가는 내가 간 게 아니라 저 부부에게 준 휴가였다.
나는 제주도에서 육아했고, 저 둘은 잠시나마 신혼부부처럼 즐겼을 것이다.

그래도 텃밭에 가서 물 한번 주고 왔다더니 풀밭이 될 줄은 몰랐겠지.

덕분에 오늘 우리 텃밭은 성대한 풀 축제를 열었다.
입장료는 없었지만 관람객은 나 혼자였고,
폐막식은 내 허리 통증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풀밭이 되어도 예쁘고,
토마토가 열려도 예쁘고,
다시 씨앗을 뿌린 밭도 예쁘다.

여행을 다녀오면 사람들은 사진부터 정리한다는데,
나는 풀부터 정리했다.
역시 나는 텃밭 체질인가 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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