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처음에는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가정용 카메라로 촬영된 화면은 거칠었고, 특별한 사건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카메라는 한 가족의 집 안을 천천히 비추고, 사람들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언성을 높였다. 영화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나는 이 작품이 지금까지 본 어떤 공포영화보다 무섭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정신질환을 앓게 된 한 여성이 가족 안에서 2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영화 속 가족은 부모와 딸, 아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버지는 세포막을 연구하는 기초의학 교수이고, 어머니 역시 기초의학자다. 의과대학에 진학했던 딸은 해부학 수업을 받은 뒤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집에서 온종일 소리를 지르고, 결국 구급차에 실려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된다.
그러나 부모는 딸에게 적절한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딸은 무려 25년 동안 집 안에서 생활한다. 외출은 거의 하지 않고,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도 단절된 채 부모와 함께 늙어간다.
시간이 흐른 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더 이상 딸을 돌볼 수 없게 되면서 딸은 정신과 시설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딸은 불과 몇 달 동안 집중적인 치료를 받은 뒤 눈에 띄게 회복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딸의 인생에서 사라진 25년이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사실.
부모가 딸을 굶긴 것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폭력을 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는 딸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들어주었다. 딸이 밖에 나가기 싫다고 하면 내보내지 않았고, 병원에 가기 싫다고 하면 억지로 데려가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이 딸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딸을 자극하지 않는 것, 딸이 싫어하는 일을 시키지 않는 것, 세상으로부터 딸을 감추고 가족 안에서 보살피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보호는 결국 딸의 삶 전체를 가두는 일이 되었다.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부모가 명백한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딸을 미워하지 않는다. 딸을 버리지도 않는다. 나름의 방식으로 딸을 사랑하고 바카라임지려 한다. 그래서 오히려 더 끔찍하다.
사랑과 폭력의 경계가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정작 그 사람이 스스로 살아갈 가능성은 빼앗을 수 있다.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선택을 대신하고, 상처받지 않게 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단절시킬 수도 있다.
영화 속 부모가 딸에게 한 일은 그런 종류의 폭력이었다.
딸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가족의 문제를 집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낯선 사람이나 제도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 치료를 받아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체념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 감정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영화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정신질환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집안의 수치처럼 여기고, 치료가 필요한 문제를 가족의 인내로 버티려는 태도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병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아서, 차라리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때때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걸려 있다.
영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한 가족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수분장도 없고 극적인 시간 점프도 없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몸이 약해진다. 부모는 늙어가고 딸도 늙어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은 흐르는데 가족의 생각과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집 안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물건들은 버려지지 않은 채 계속 쌓여간다. 방과 복도는 점점 물건으로 가득 차고, 집은 시간이 멈춘 장소처럼 변한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꾸며놓은 설치미술처럼 기괴하고 숨이 막힌다.
영화를 보다 보면 집 안에 쌓인 물건들과 가족의 생각이 서로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버리지 못한 물건, 수정되지 않은 믿음, 바뀌지 않는 관계.
모두가 제자리에 남아 조금씩 썩어간다.
딸은 분명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오래 보고 있으면 정말로 병들어 있는 것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소리를 지르고 이상 행동을 하는 사람은 딸이지만, 변화의 가능성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은 부모다. 딸은 치료를 통해 변할 수 있었지만, 부모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미쳐 있는 사람은 딸인데, 더 무서운 사람은 부모였다.
아마 이 영화의 공포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변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는 것과 성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오랫동안 살아왔다고 해서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가족을 사랑한다고 해서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이 익숙한 방식에 더 깊이 갇힐 수 있다.
자신이 아는 세계만이 전부라고 믿고, 새로운 선택을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과거의 판단을 수정하는 대신 같은 결정을 반복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는 평온하게 지나가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10년이나 20년이 사라져 있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제목부터 잔인하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계속 질문하게 된다.
그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아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의료진은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가족의 결정에 외부인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잘못 선택해서 벌어진 비극도 무섭지만,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은 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생긴 비극은 더욱 무섭다. 실패는 적어도 다른 길을 시도했다는 흔적을 남기지만, 변화를 거부한 시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한 사람의 삶을 삼켜버린다.
이 영화에는 극적인 악인도, 선명한 폭력도 없다.
그저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걱정이 있고, 오랜 시간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아는 세계 안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생각을 지키고 싶고, 새로운 사람과 방법을 믿는 일이 어려워진다.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보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반복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
영화 속 부모의 모습이 특별히 기괴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성향이 극단까지 밀려간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래 남는다.
실제로 이런 가족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무섭지만, 그들의 선택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 무섭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정신질환을 다룬 영화이면서 동시에 가족과 사랑, 바카라임과 개입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화를 거부한 시간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삼켜버리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내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딸의 비명도, 물건으로 가득 찬 집도 아니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아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변화하지 않는 편이 당장은 편안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말한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 실패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