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을 갖기까지

1938 타이완 여행기

by키튼


나는 타이완을 좋아한다.


처음부터 타이완이라는 나라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십여 년 전, 영어 공부를 해보겠다고 필리핀으로 일주일 남짓 짧은 어학연수를 갔을 때 타이완 친구들을 만났다. 여행이라고 하기도, 어학연수라고 하기도 애매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꽤 가까워졌다. 내가 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는 나를 만나러 부산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나 역시 타이완을 여행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타이난이었다. 타이베이가 작은 서울이나 도쿄처럼 느껴졌다면, 타이난은 훨씬 낯설고 이국적이었다. 오래된 골목과 사원, 아기자기한 건물, 친절한 사람들, 표준 중국어와는 조금 다르게 들리는 말까지. 그곳에서 나는 타이완이 중국과 전혀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타이완은 작지만 단순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여러 집단과 하카인, 원주민이 함께 살아왔고, 표준 중국어뿐 아니라 민난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가 공존한다. 오히려 사람들의 정서나 태도에서는 중국보다 한국과 닮았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래서 《1938 타이완 여행기》를 읽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여행을 떠올렸다.




이 소설은 1938년, 일본인 여성 작가 아오야마 치즈코가 식민지 타이완을 여행하며 겪은 일을 기록한 여행기처럼 구성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타이완을 식민 지배하고 있었고, 남진 정바카라을 내세워 영향력을 남쪽으로 확대하던 시기였다. 치즈코의 여행 역시 순수한 개인 여행이라기보다는 제국의 문화적 선전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이 설정부터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당장 먹고사는 일조차 힘겨웠는데, 일본의 여성 작가는 해외에서 사계절을 보내야 비로소 한 나라를 이해할 수 있다며 식민지로 여행을 떠난다.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조금 재수 없다.


실제로 치즈코는 소설 내내 꽤 재수 없는 인물이다. 악한 사람은 아니다. 여성에게 결혼과 순종을 요구하는 일본의 가부장적 질서에 반항하며, 작가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식민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특권을 누리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일본이 타이완 곳곳에 벚꽃을 심고, 기존 사원과 거리를 밀어내고 대로를 건설한 모습을 보며 치즈코는 일본이 가져온 근대화에 감탄한다. 타이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삶과 신앙이 파괴된 일인데, 치즈코는 그것을 발전이라고 받아들인다. 제국의 중심부에서 온 사람이 식민지를 바라볼 때 생기는 무지와 오만이 그대로 드러난다.


치즈코의 통역을 맡는 사람은 타이완 여성 샤오첸이다. 샤오첸은 일본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타이완의 역사와 여러 민족의 문화, 음식에 깊은 이해를 가진 인물이다. 유력한 집안의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집안의 중심에서는 비껴나 있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주류 문화뿐 아니라 소수자와 주변부의 문화까지 폭넓게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샤오첸은 치즈코에게 타이완의 음식을 소개한다. 관청에서 마련한 일본식 ‘내지 음식’이 아니라, 민난인과 하카인, 원주민과 평범한 타이완 사람들이 먹어온 음식을 차려준다. 소설은 열두 가지 음식 이야기를 따라 전개되는데, 음식은 단순한 관광 상품이 아니라 타이완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통로가 된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사람들이 어린잎을 끓여 먹었던 탕, 하카식 쌀국수, 다진 고기와 버섯을 졸여 밥에 얹어 먹는 음식, 잔칫날 남은 재료를 모아 만드는 잔반탕까지. 음식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사정과 기억이 배어 있다. 치즈코는 타이완 음식에 거의 홀리다시피 하고, 요리를 잘하는 샤오첸에게 계속해서 음식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이라고만 부르기 어려운 감정이 생겨난다.


치즈코는 적극적이다. 샤오첸에게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말하고, 가부장적인 집안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자고 설득한다. 일본인 남성과의 정략결혼을 앞둔 샤오첸에게 “왜 너처럼 뛰어난 사람이 그런 질서에 순응하느냐”고 따진다. 심지어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말까지 거리낌 없이 꺼낸다.


처음에는 그것이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유로운 여성이 억압받는 여성을 구해내려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치즈코의 말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샤오첸이 왜 가족과 슬롯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지, 그 선택에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치즈코에게는 떠나면 그만인 여행지이지만, 샤오첸에게 타이완은 떠날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치즈코는 샤오첸을 아끼면서도 자신의 방식대로만 사랑한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당연히 상대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샤오첸은 결국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잔반탕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절교를 선언한다.

잔반탕은 이름만 들으면 초라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두 가지 잔치 음식을 모두 만들어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는 호화로운 음식이다. 풍성한 잔치가 끝난 뒤 남은 것들을 모아 만드는 음식.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나는 장면에 이 음식이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시간 역시 많은 감정과 기억을 남기고 끝난 하나의 잔치처럼 느껴진다.


소설 후반부에서 치즈코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쏟아부었다고 사과한다. 자신은 좋아서 한 행동이었지만, 샤오첸은 그것을 원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 작품은 식민지의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처럼 보인다. 실제로 식민지라는 구조는 두 사람의 관계 전체를 지배한다. 치즈코는 자유를 말하지만 제국의 시민이었고, 샤오첸은 자신의 감정마저 마음대로 선택하기 어려운 식민지 여성이었다.




하지만 바카라을 다 읽고 나면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다른 슬픔이 남는다. 나는 그것을 ‘언어의 빈곤’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우정만은 아니다. 치즈코가 샤오첸에게 보이는 집착과 열망, 샤오첸이 평생 치즈코를 기억하는 방식은 사랑에 가깝다. 샤오첸은 훗날 당시 치즈코의 청혼이 “싫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감정을 절제하도록 교육받고 살아온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의 최대한의 고백이다.


그런데 1938년의 두 여성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어려웠고, 꺼낸다고 해도 슬롯적으로 이해될 만한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소설의 가장 슬픈 부분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자신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스스로 제대로 말할 수조차 없었다는 데 있다.


후대의 사람들이 남겨진 기록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1970년대에는 식민지 관계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1990년대 이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 두 사람의 감정을 새로운 언어로 읽어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같은 기록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두 여성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비교적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단어가 허락되지 않았다. 언어가 없으면 감정도 온전히 존재하기 어렵다. 감정을 느끼면서도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상대에게 설명할 수도 없으며, 결국 우정이나 동경, 집착 같은 불완전한 단어 주변을 맴돌게 된다.




《1938 타이완 여행기》는 음식 여행기로도 즐겁고, 식민지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로도 흥미롭다. 특권을 자각하지 못하는 일본인 작가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타이완 여성의 관계를 다룬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사랑을 표현할 말이 없었던 두 사람의 쓸쓸함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음식 이름과 타이완어 표현 옆에 한자를 충분히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이완은 표준 중국어와 민난어, 하카어 등 여러 언어가 겹쳐 있는 곳이다. 같은 한자도 언어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히고, 음식 이름의 발음 속에도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담겨 있다. 한자 표기가 함께 있었다면 음식과 언어, 민족의 관계를 훨씬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카라을 덮고 나니 다시 타이완에 가고 싶어졌다. 타이난의 골목을 걷고, 바카라에 등장한 음식들을 하나씩 찾아 먹고 싶다. 그리고 어쩌면 여행지의 음식이란 단지 맛있는 한 끼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기억하는 하나의 언어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말이 없었던 두 여성도 결국 음식으로 서로를 기억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요리의 냄새와 맛, 오래된 기록 속에 남아 후대의 독자에게 도착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