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산다는 착각

영화 《제이 켈리》를 보고

by키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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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켈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제이 켈리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공로상 시상식에 참석하러 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한 사람의 여행을 따라가기보다, 그가 지나온 삶의 장면과 현재의 인간관계를 흩어진 기억처럼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면서 제이 켈리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조금씩 드러낸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이런 질문이 등장한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왜 이토록 어려운가.

처음에는 이 문장이 매우 익숙한 자기계발적 명제로 들렸다. 타인의 시선이나 슬롯의 기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자 이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생각하는 ‘나’만이 진짜 나라고 믿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과 욕망이 나를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는 피상적이고 왜곡된 이미지일 뿐이며, 내 안의 진짜 모습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오만일지도 모른다.




제이 켈리는 세계 누구나 알아보는 스타다. 그러나 ‘제이 켈리’라는 이미지는 그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에이전트와 수많은 스태프가 오랜 시간 함께 만들어낸 협업의 결과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제이 켈리와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제이 켈리 사이에는 당연히 간극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내면만을 진실이라고 믿기 시작하면서 발생한다.

그는 충동에 따라 일정을 바꾸고, 무바카라임하게 딸의 유럽 여행을 쫓아간다.(표면상의 이유는 이탈리아에서 공로상 수상이다.) 얼핏 보면 스타로서의 역할을 내려놓고 아버지이자 한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그를 도왔던 사람들은 하나씩 지쳐 떠난다.

한 스타일리스트는 그를 위해 일하느라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놓쳤다. 매니저 역시 아이가 아픈 상황에서도 가정을 뒤로하고 제이 켈리의 곁을 지킨다. 그러나 제이 켈리는 그 헌신을 인정하기보다 “내 수입의 15퍼센트를 받으니까 이 일을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그의 삶은 이미 수많은 사람의 삶과 얽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 회사에서는 온라인 게임인이고, 집에서는 남편이며, 부모님 앞에서는 아들이다. 누군가의 친구이자 동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할들은 가짜 자아가 아니다. 오히려 타인과 맺어온 관계 속에서 형성된, 분명한 나의 일부다.

그런데 자신의 취향과 욕망만을 진정한 자아라고 여기며 “나는 나답게 살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관계 속에서 감당해야 할 바카라임들은 손쉽게 지워진다. 나답게 산다는 말이 때로는 타인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바카라임을 회피하는 핑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제이 켈리는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인물도 아니다. 그는 과거 친구의 기회를 빼앗았고, 가족보다 자신의 커리어를 늘 앞세웠다. 큰딸에게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정작 딸을 위해 실제로 시간을 내준 적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치즈케이크는 이런 자아의 모순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처럼 보였다. 제이 켈리는 어느 순간 자신이 치즈케이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느냐고 화를 낸다. 그러자 매니저는 의아하다는 듯 말한다.

“너 치즈케이크 좋아했잖아.”

영화 후반부에서 그는 무심코 치즈케이크를 먹고는 “맛있네”라고 말한다.

사소한 장면이지만, 나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의 핵심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고, 저런 것은 싫어하며,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규정해왔지만, 그 확신은 생각보다 쉽게 변한다. 우리가 자아라고 믿는 취향과 신념 가운데 상당수는 일시적인 감정이나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의식할수록 우리는 자신과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영화 속 젊은 제이 켈리와 친구가 함께 연기를 연습하는 장면은 이 역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제이 켈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지나치게 의식한다. 잘 연기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몸과 표정에는 힘이 들어가고, 그의 연기는 오히려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워진다.


자신을 찾으려 할수록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자신을 잊어버릴 때 오히려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역설.


어쩌면 ‘나로 산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규정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주장하는 대신, 내가 맺고 있는 관계와 지금 맡은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은 내 머릿속에 완성된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와 구체적인 행동 속에서 계속 만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릿하다. 공로상 시상식 장면마저 실제 사건인지, 제이 켈리의 환상인지 분명하지 않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이 죽기 직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긴 회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배우는 영화 속에서 실수하면 장면을 다시 찍을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같은 대사를 여러 번 반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다시 찍을 수 없다. 이미 놓쳐버린 순간과 상처 입힌 관계를 이전 장면으로 돌아가 고칠 수는 없다.


그래서 나 자신으로 산다는 일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내 욕망에 솔직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삶과 내가 바카라임져야 할 삶 사이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경험한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야 한다.

결국 진정한 나는 혼자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타인과 함께 만들어가는 존재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지나치게 붙들지 않을 때, 눈앞의 사람과 일에 온전히 몰입할 때, 가장 자신다운 모습에 가까워지는지도 모른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