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말과 내가 살아가는 삶 사이에서
얼마 전, 친한 지인을 만났다.
교육청에서 근무하는 그녀는 요즘 학교 교사와 교감, 교장 선생님들, 위센터와 위클래스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한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게 강의를 하나 부탁했다. 자신도 관련 교육을 하고 있지만, 이번 내용은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기회를 건넸다.
고마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하필 강의 다음 날이 중요한 시험이었다. 준비할 시간이 빠듯해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사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교육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지금도 교정시설에서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수용생활에 관한 교육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고, 과거에는 심리치료와 관련된 이수명령 교육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왠지 자신이 없었다.
학교 선생님들과 상담 전문가들 앞에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물론 전문성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남들 앞에서 온갖 좋은 소리를 늘어놓고 내려온 뒤,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남에게 참 좋은 말을 많이 한다.
전문가인 양 관련 지식을 늘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제법 그럴듯한 인생의 조언도 건넨다.
자신을 사랑하라고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말라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용하라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나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어떤가.
남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해놓고 나는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나를 쥐어박는다.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말라고 해놓고 정작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며칠씩 곱씹는다.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말하면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하나 제대로 품지 못한다.
그런 주제에 강단에 서서 삶이 어떻고 마음이 어떻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떠든다?
생각만 해도 낯이 뜨거웠다.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는 순간,
내 안에서 누군가가 비웃을 것 같았다.
'지랄하고 있네.'
'야! 너나 잘 살아.'
'너는 그래서 그렇게 살고 있냐?'
남들의 비난보다 그 목소리가 더 무서웠다.
남들은 나를 다 모르지만, 나는 아니까.
내가 얼마나 자주 무너지는지
얼마나 속 좁고 못된 생각을 하는지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얼마나 자주 지키지 못하는지
남들에게 위선자로 보이는 것보다 내가 나를 위선자라고 느끼는 일이 더 두려웠다.
그런 생각이 쌓이면 결국 나 자신이 싫어질 것 같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지인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그게 제일 무서워. 남들 앞에서는 온갖 좋은 소리를 다 해놓고, 정작 나는 그렇게 못 살잖아. 강의 끝나고 내려오면 내가 나한테 그럴 것 같아. 야, 너나 잘 살아. 너는 그렇게 살고 있냐고."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아, 그치 그치! 맞아!"
위로는커녕 냅다 맞장구부터 쳤다.
"그렇지! 강의할 때는 온갖 좋은 말 다 하지. 근데 내려와서 생각하면, 야, 너나 잘 살아! 너도 못하면서 누굴 가르쳐!"
본인도 그런 생각을 한다며 아주 신나게 거들고 있었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내가 속으로 나에게 퍼붓던 말들을 누군가가 이렇게 대놓고, 그것도 찰지게 대신해 주니 웃기면서도 묘하게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근데 나는 그런 생각이 꼭 나쁘다고 보지는 않아."
"왜?"
"그런 생각이 드니까 자기를 돌아보는 거잖아. 강의 잘하고 박수받고 내려오면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잖아. 근데 그때 스스로 물어야지. 야, 너는? 너는 그렇게 살고 있냐고. 그게 오히려 교만해지지 않게 해주는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그동안 내 안의 그 목소리가 싫었다.
툭하면 부족함을 들춰내고, 기껏 쌓아 올린 자신감을 무너뜨리고, 결국 나 자신까지 초라하게 만드는 목소리.
그런데 그 목소리가 나를 무너뜨리기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니.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남들 앞에서 좋은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내가 그 말을 모두 살아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내 이야기에 감동했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착각한다.
내가 아는 것을 내가 살아낸 것으로.
말을 잘하는 것과 삶을 잘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도.
그때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야, 너는?'
'너는 네가 한 말대로 살고 있냐?'
그 질문은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한다.
어떤 부끄러움은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고, 어떤 불편함은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너는 왜 그것밖에 안 돼?'
이렇게 나를 몰아세우면 자기혐오가 된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말대로 살지 못하는구나.'
이렇게 나를 돌아보면 성찰이 된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과 부족한 나를 미워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나는 그 둘을 자꾸 혼동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시작한 반성이 어느 순간 나 자신을 공격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내가 남들에게 하는 좋은 이야기들은 사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어려우니까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타인의 평가에 흔들려봤으니까 그 시선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내 감정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날이 있으니까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고 말한다.
나는 그것들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살아내지 못한 말이 모두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처받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위로할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도 누군가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말을 남에게만 적용하지 않으면 된다.
얼마 전 나는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는 나에 관한 글을 썼다.
백 명이 나를 바라본다면 백 개의 서로 다른 내가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평가를 지나서도 변하지 않는 나로 남고 싶다고.
그런데 이번 대화에서 또 하나를 깨달았다.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내가, 정작 나 자신의 평가에는 가장 잔인하게 휘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하면서, 나에게만 완벽해질 것을 요구했다.
이 얼마나 지독한 모순인가.
이번 강의는 결국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제안 덕분에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다.
나는 내 말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부끄러울 때마다 나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 사이에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좁혀가는 것이 삶이지, 그 거리가 있다는 이유로 나를 벌할 일은 아니다.
언젠가 다시 강단에 서게 된다면 내 안의 그 까칠한 목소리는 어김없이 빈정거릴 것이다.
'야, 너는 그렇게 살고 있냐?'
그때는 피하지 않고 대답해 주려 한다.
'아직은.'
남들에게는 그토록 이해와 수용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나에게만 평생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내 안의 그 목소리가 또다시 호통을 친다면,
'야, 너나 잘 살아.'
나도 한마디 해줘야겠다.
'그러게. 그러니까 좀 도와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