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위에 얹힌 것 하나를 치워주었을 뿐인데
구미로 1박 2일 출장을 갔다.
남편이 맡은 물놀이 행사에 온 가족이 동원됐다. 딸은 안전요원이 되어 유아 풀장을 맡았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물 밖으로 튀어나가는 아이들을 살피고 엄마들의 질문에도 제법 능숙하게 대답했다.
하루가 지나자 동네 엄마들과도 얼굴이 익었다.
문제는 둘째 날 행사가 끝날 무렵 생겼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커다란 워터슬라이드를 정리해야 했다. 바람을 빼면서 안에 가득 찬 물도 함께 빼야 했는데 물이 아파트 입구 쪽으로 흘러가면 안 된다고 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배수구 뚜껑을 열어 물길을 내달라고 했다.
딸이 그 말을 아빠에게 전했다.
남편은 일할 때 꽤나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그날도 정신없이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평소 자신이 일하던 방식과 달랐는지 뚜껑을 열려면 연장이 있어야 한다며 딸에게 큰소리를 냈다.
하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였다.
조금 전까지 딸과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들도 있었고 딸이 돌봐주던 아이들도 있었다.
딸의 얼굴이 금세 굳었다.
그 뒤로 아이가 일을 못 했다.
물이 한쪽으로만 빠지게 워터슬라이드를 힘껏 눌러야 하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이쪽에 갔다 저쪽에 갔다 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다 내게 와서 말했다.
“엄마. 아빠가 사람들 다 있는데서 나한테 큰소리로 화냈어.”
나는 하던 일을 멈췄다.
“그랬어? 진짜 창피했겠다.
다 아는 사람들인데. 속상했겠네.”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는 남편에게도 한마디 했다.
왜 애한테 사람들 다 있는데서 그렇게 말하냐고.
게다가 문제의 뚜껑은 가위 끝을 살짝 넣으니 열렸다. 거창한 연장도 필요 없었다.
나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딸에게 온통 마음이 쓰였다. 아이보다 내가 더 화가 나고 더 속상했다.
그런데 잠시 뒤 조금 놀라운 장면을 봤다.
애가 갑자기 신이 났다.
정말 말 그대로 신이 났다.
조금 전까지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서성이던 아이가 워터슬라이드 위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했다. 물이 이쪽으로 잘 빠져야 한다며 온몸으로 누르고 밀었다. 옷이 흠뻑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환해져서는 혼신을 다해 일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신기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금방 달라질 수도 있구나.
아까와 지금 사이에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였고 물은 여전히 빼야 했고 워터슬라이드는 여전히 무겁고 축축했다.
달라진 건 딸의 마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무안했던 마음. 아빠에게 서운했던 마음. 창피했던 마음.
그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사람이 다시 신이 났다.
나는 그날 ‘신이 난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봤다.
물론 ‘신이 난다’의 ‘신’이 신성(神性)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그 말을 내 마음대로 읽어보고 싶어졌다.
신이 난다. 내 안에 있던 신성이 밖으로 난다.
여기서 말하는 신성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기와 힘.
순수함. 자기 다운 모습.
딸에게서 나는 그것을 본 것 같았다.
마음을 덮고 있던 서운함 하나가 걷히자 그 아래 있던 아이가 다시 튀어나왔다.
어쩌면 사람은 원래 이렇게 신나게 살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위에 서운함 하나가 얹히고 수치심 하나가 덮이고 화와 슬픔과 부끄러움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안에 있던 것이 나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라 미처 느끼고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마음 어딘가에 남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걸 조금 안다.
어린 시절 사람들 앞에서 아빠에게 핀잔을 듣고 느꼈던 수치심을 그 자리에서 충분히 느끼지도 못하고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한 채 삼켜버린 적이 있다.
없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없어진 게 아니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사라지는 대신 내 안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그 마음은 사라진 척 숨어 있다가, 긴 시간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마음은 묻어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나는 물길보다
딸의 마음길을 먼저 터주고 싶었다.
물이 조금 엉뚱한 곳으로 흐르면 닦으면 된다.
일이 조금 늦어지면 조금 더 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막 수면 위로 올라온 아이의 마음을 다시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 나 속상해.”
그렇게 말해준 것이 오히려 고마웠다.
말할 수 있을 때 들어주는 것.
울 수 있을 때 울게 하는 것.
화가 났을 때 “화났구나” 해주는 것.
나는 그게 참 중요한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마음 깊숙이 숨어버리고 나면 그것을 다시 꺼내 바라보는 데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말했다.
“딸한테 사과해.”
그리고 딸에게는 내가 그날 본 것을 말해주었다.
“엄마가 너를 봤는데 네 마음 알아주고 나니까 갑자기 진짜 신이 나더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어.”
생각해 보면 나는 내 마음을 그렇게 제때 돌보며 살지는 못했다.
그래서 꽤 오래 돌아왔다.
하지만 그 긴 시간이 꼭 손해만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오래 헤매본 덕분에 누군가의 얼굴에서 금세 지나가는 서운함을 조금 더 빨리 알아보게 되었으니까.
말보다 먼저 굳어지는 표정도
괜찮다고 하면서 괜찮지 않은 마음도
사소한 일처럼 보여 차마 꺼내지 못하는 수치심도 조금은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그러려고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미처 꺼내주지 못했던 어린 날의 내 마음까지 되돌아가 구해낼 수는 없어도 지금 내 앞에 있는 누군가의 마음 한 자락은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날 딸은 온몸이 흠뻑 젖도록 신나게 일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을 신나게 해주는 건 무언가를 더 채워주는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마음 위에 얹혀 있던 것 하나를 알아봐 주는 것.
그것 하나 치워주었을 뿐인데 그 아래 있던 사람이 다시 나왔다.
신이 났다.
그 사람 안에 원래 있던 신이 밖으로 났다.
적어도 그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