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하는 짐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다

by쭈쓰빵빵

나는 사람이 오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요양원이나 병원에 누워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삶, 의식 없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는 삶까지 무조건 길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가능하다면 오래 자기 힘으로 하루라도 더 살아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몸은 늙는다.

잘 보이던 눈이 흐려지고

잘 걷던 다리에 힘이 빠지고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이

어느 날 버거워진다.

그런데 몸과 반대로 갈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의 내면이다.

나는 우리가 어쩌면 영혼을 성숙시키기 위해 인간의 삶을 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몸의 기능은 나이가 들수록 하나씩 줄어들지만 사람의 내면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랄 수 있다.

더 넓어질 수도 있고 더 가벼워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성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요즘의 나는 그것이 결국 비워지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지려 했던 것을 놓고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을 놓고

내가 옳다는 마음을 놓고

쌓아놓은 것을 나누고 내가 가진 지혜를 건네면서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수많은 욕심과 두려움을 걷어내고 나면

그 아래 있던 본래의 내가 조금씩 드러나는 것.

나는 그것이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우려면 먼저 채워야 한다.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 수는 없다.

젊을 때는 욕심도 부려봐야 한다.

돈도 벌어보고 싶고 사랑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쓰고 타이틀 하나에 우쭐해보기도 하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가져본다.

가지려고 애쓰고
채우려고 애쓰고
쌓으려고 애쓴다.

그래야 가져 본 마음도 알고 잃어 본 마음도 안다. 지키느라 애태워본 사람만이 놓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나는 많이 잃어봤다.

돈도 잃어보고 사람도 잃어보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도 잃어봤다.

그래서 이 말만큼은 조금 당당하게 할 수 있다.

채우는 것만 인생인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잃는 것은 실패이고 비워지는 것은 초라해지는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잃고도 살아보니 빈자리에는 또 다른 것이 들어왔다.

사람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고 나를 보는 마음도 달라졌다.

어쩌면 비운다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일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에 목숨 걸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인생이 산이라면 젊은 날은 산을 오르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숨이 차도록 오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상에 닿으면 내려와야 한다.

나는 요즘 산을 잘 오르는 것만큼이나 잘 내려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가졌던 것을 조금씩 놓고 욕심을 덜어내고 가진 것을 나누고 내가 아는 것을 건네며 내려오는 것.

어쩌면 늙는다는 것은 시들어가는 일이 아니라 잘 비워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을 오르는 데만 평생을 다 써버리지 않기 위해서.

내려오는 길도 충분히 걸어보기 위해서.




그런데 며칠 전 아빠 때문에 오래 산다는 것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요즘 부모님께 좋은 것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다.

여행도 보내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싶다.

전에 함께 여행을 다녀왔을 때 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당분간은 잘 지내겠다.”

여행 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살도 조금 오르고 기력도 생겼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빠가 참 좋아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좋은 데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자식들이 해주는 호강도 조금 더 누리려면 아빠도 ‘더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이번 달에는 그러지 못했다.

공부할 것도 있었고 시험도 있었고 날은 지독하게 더웠다. 남편 일도 도와야 했다. 밥은 사드렸지만 어디 한 번 제대로 모시고 가지 못했다.

그러다 엊그제 엄마와 통화를 했다.

“아빠가 일어나질 않아. 계속 누워만 있어. 기력이 하나도 없네. 걱정이다.”

전화를 끊고 마음이 쓰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좋은 곳에 또 가고 싶어서.
맛있는 것을 한 번 더 먹고 싶어서.
자식에게 용돈도 받고 조금 더 호강하고 싶어서.

그런 것들도 분명 사람을 살게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사람이 삶을 억척스럽게 붙들 수 있을까.

얼마 전 유튜브에서 EBS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았다.

아흔넷의 어머니가 아들의 세끼 밥을 해주는 이야기였다.
아내와 사별한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곁에 와 있는 것이 그저 좋았다.

아흔넷이면 누군가 차려주는 밥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의 하루 세끼를 챙긴다. 화면 속 밥상에는 반찬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말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한 상 가득이었다.

아들이 돌아와 좋고 내가 해준 밥을 먹는 것이 좋고 내일 아침에도 또 밥을 해줄 수 있어서 좋다.

어쩌면 그 마음이 어머니를 아침마다 일어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오래 살아서 아들 밥을 해주고 싶다.

하루를 더 살면 한 끼를 더 해줄 수 있고
사흘을 더 살면 사흘의 밥을 더 챙길 수 있다.

그 어머니에게 오래 산다는 것은 자신의 생을 하루 더 이어가는 일이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밥 한 끼를 더 해주는 일이었다.

그때 영화 《말아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아들 초원을 키우는 엄마에게 기자가 소원을 묻는다.

엄마가 대답한다.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죽는 게 소원이에요.”
내가 먼저 죽으면 이 아이를 누가 돌볼까.
그러니 아들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은 것이다.

한 어머니는 아들이 좋아서 하루라도 더 밥을 해주고 싶고
한 어머니는 아들을 두고 갈 수 없어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한다.

마음의 모양은 다르지만 두 사람의 삶에는 자신 말고도 내일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은 반드시 좋은 것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해서 더 살고 싶기도 하고
바카라임져야 해서 더 살아야 하기도 한다.

누리고 싶은 것이 우리를 내일로 데려갈 때도 있지만
지켜야 할 것이 우리를 오늘에 붙잡아둘 때도 있다.

내가 돌봐야 할 사람.
내가 끝내야 할 일.
내가 갚아야 할 빚.
내가 건너야 할 고비.
내가 바카라임져야 할 것.

우리는 그런 것들을 종종 짐이라고 부른다.

이것만 없으면 편할 텐데.
이것만 해결되면 살 것 같은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당장 죽을 수 없는 이유는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아직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갚아야 할 것도 있고 마무리해야 할 것도 있다.

‘이것까지만 해놓고.’
‘아이들이 자기 앞가림할 때까지만.’
‘이 빚은 다 갚고 두 다리 뻗어야지.’

그렇게 우리는 내일로 간다.

참 이상하다.

내 삶을 무겁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나를 삶에 붙들어 매고 있다.

넘어야 할 난간이 있으니 손에 힘을 준다.
건사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 아침에 일어난다.
갚아야 할 것이 있으니 다시 일을 한다.
끝내야 할 일이 있으니 내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를 더 살아내는 동안 나는 또 하나를 경험한다.

하나를 깨닫고
하나를 용서하고
하나를 내려놓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짐이라고 불렀던 것들은 단지 나를 힘들게 하려고 내 삶에 온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산에서 너무 일찍 내려가 버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
오래 누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해서도 아니다.

젊은 날 그렇게 애써 채웠으니 이제는 비우는 법도 배워야 한다.

나는 많이 가져보려고 했고 많이 잃어봤다.
그러니 내려오는 길에서는 조금 달라도 괜찮다.


가진 것을 나누고
미워했던 것을 용서하고
움켜쥐었던 것을 놓고
마지막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가벼운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 더 살아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내가 그토록 벗어던지고 싶어 했던 삶의 무게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무겁고 벗어던지고 싶은 날도 있다.


그래도 그 무게 때문에 나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
내 몫의 하루를 산다.


짐은 여전히 내 등에 있다.


그 무게가 오늘도 나를 살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