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법
새벽 두 시였다.
남편과 연락이 끊겼다.
남편은 원래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아이들을 겨우 재워 놓고 나도 잠깐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새벽 두 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혹시 사고가 난 건 아닐까
맨발에 가까운 차림으로 집을 뛰쳐나갔다.
새벽 거리를 몇 바퀴나 돌며 남편 차를 찾았다.
차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길 한가운데 서서 울고 있었다.
한 시간쯤 뒤에야 남편은 대리운전을 불러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야 알았다.
술에 너무 취해 차 안에서 잠이 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때는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과 풀지 못한 채 밤을 꼬박 새웠다.
그날은 대학병원에서 치매 심리검사를 하는 날이었다.
몇 달 전부터 예약한 어르신들을 전국 각지의 자녀들이 모시고 오는 검사였다.
미룰 수도 없었다.
한숨도 못 잤지만 병원으로 갔다.
검사는 어떻게든 끝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점심 약속도 취소했고
함께 일하는 교수님 댁 저녁 식사도 가지 못했다.
친구와의 약속까지 취소하려는데
내 성격을 잘 아는 친구가 말했다.
"커피 한 잔만 마시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내면 안 되지."
나는 겨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 그대로 쓰러졌다.
그때 알았다.
속상한 일 하나면 충분했다.
일상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양치도 하기 싫고 비타민 통도 열기 싫고 운동복도 꺼내기 싫었다.
하루를 놓치면 이틀이 무너졌고 이틀이 무너지면 일주일이 사라졌다.
운동도 사람도 해야 할 일도 하나가 쓰러지면
나머지는 도미노처럼 따라 넘어졌다.
가장 힘든 건 무너지는 일이 아니었다.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사건은 그날 끝났지만 일상은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그렇게 몇 번을 무너지고 몇 번을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하나씩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예전의 나는 일상이 무너지면 며칠이고 술만 퍼마셨다.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술은 상처를 끝내 주는 것이 아니라 다음 날의 일상까지 함께 무너뜨렸다.
그래서 바꿨다.
아무리 울어도 출근은 한다.
미리 잡은 약속은 웬만하면 지킨다.
아무리 속상해도 운동은 간다.
술을 진탕 마시고 꽐라가 될지언정
그건 운동을 끝낸 다음 일정이다.
눈물을 훔치며 운동할지언정
운동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 하나를 바꿨다.
예전의 나는
늘 100%로 살았다.
무슨 일을 하든 잘해야 했고 인정받아야 했고
칭찬받아야 했다.
그 마음이 나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살아 보니 문제는 능력이 아니었다.
나를 무너지게 한 것은 내가 나에게 들이대던 기준이었다.
뭐든 잘해야 했고 실수하면 안 됐고 늘 100점 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념을 하나 바꿨다.
'잘해야 한다.'
대신
'욕만 안 먹어도 성공이다.'
'70%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에도 비상구가 생겼다.
남겨 둔 30%는
예상하지 못한 슬픔을 위해
갑자기 찾아오는 상처를 위해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무너지는 날을 위해 남겨 둔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꿈틀꿈틀.
정말 아무것도 안 되는 날이 있다.
몸도 마음도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 날.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간다.
그럴 때는 뛰지 않는다.
아니,
걷지도 기지도 않는다.
한숨
또 한숨.
그리고
꿈틀.
꿈틀.
꿈틀.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숨 한 번.
그것이면 된다.
신기하게도
진흙탕에서는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진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숨통을 놓지 않겠다.
그 마음 하나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꿈틀
꿈틀
거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나를 끌어낸다.
빠져나온 건 내 힘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나를 살려준다.
사람도 남겨 두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찾는 사람
조언이 필요할 때 찾는 사람
많지 않다.
단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혼자 버티는 것보다
손을 내미는 것이
나를 더 오래 살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살아 보니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오래가는 게 아니었다.
다시 걸을 힘을 남겨 둔 사람이 오래갔다.
나는 지금도 무너진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그래도 출근은 한다.
운동도 간다.
정말 안 되는 날은
한숨을 쉰다.
그리고
꿈틀꿈틀
꿈틀이가 되어 좀비처럼 버틴다.
그것이면 충분한 날이 있다.
그렇게 하루를 견디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나를 다시 데리고 나온다.
나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져도
다시 돌아오는 길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일상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