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뒷방 ⑪ Marina Abramović

2011 갈라 디너에서의 선언과 그 자리

byWenza
2011mocagalaartistlifemanifestodirectedjpn92ocilf8l.jpg「An Artist's Life Manifesto(예술가의 삶 선언)」


2011년 11월 12일 저녁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769명의 손님이 대형 텐트에 도착합니다. 입구에서 퍼포머들이 손님들에게 흰 실험 가운을 입혀주고, 입구 위에는 문장 하나가 투사돼 있습니다. 이날 갈라의 제목이 된 텍스트, 아브라모비치의 「An Artist's Life Manifesto(예술가의 삶 선언)」의 한 조항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TH4wYhWH54

Marina Abramović - An Artist's Life MANIFESTO (2011)


텐트 안의 테이블은 값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 팔렸습니다. 10만 달러 테이블의 중앙에서는 나체의 여성 퍼포머가 회전하는 플라스틱 해골 아래 누워 있고 — 아브라모비치의 옛 작업 《해골과 함께 있는 누드》의 재연입니다 — 5만 달러와 2만 5천 달러 테이블에서는 사람의 머리가 상판 구멍 위로 올라와 천천히 돌아갑니다. 아브라모비치는 리허설에서 규칙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오락이 아니라 실험이다.
손님은 퍼포머에게 먹이거나 만지거나 말을 걸 수 없다.
퍼포머는 원하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


무대에서는 퍼포머들이 선언문 전문을 낭독했고, 세르비아 민요가 불렸고, 데비 해리가 들것에 누운 채 등장해 노래했습니다. 마지막엔 아브라모비치와 해리를 본뜬 실물 크기 케이크 두 개가 올라왔고, 두 사람은 칼로 케이크의 심장을 잘라냈습니다. 어느 한 손님은 "이건 예술이 아니라 쓰레기"라고 외치며 자리를 뜨기도 했습니다. 어떤 감상이었든 그날 밤 모금액은 250만 달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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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CA Gala 2011—An Artist's Life Manifesto with artistic direction by Marina Abramović


이 갈라 디너의 제목이 된 선언문부터 봅니다. 열여덟 개 섹션으로 된 규범의 목록입니다. "예술가의 처신"에서 시작해 연애, 고통, 침묵, 고독을 지나 "여러 죽음의 시나리오"와 "여러 장례 시나리오"로 끝납니다. 같은 문장이 세 번씩 그대로 반복되는 형식으로 쓰이는데, "예술가는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가 세 번, "예술가는 다른 예술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가 세 번, 눈으로 읽는 글이 아니라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을 전제한 텍스트로 구성됐습니다. 첫 섹션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술가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거짓말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훔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든 미술 시장 앞에서든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An artist should not lie to himself or others. An artist should not steal ideas from other artists. An artist should not compromise for himself or in regard to the art market.

—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예술가의 삶 선언」 (히르숀미술관 간행본, 2011)


사실 이 선언문은 갈라 디너를 위한 선언문은 아닙니다. 갈라보다 일곱 달 앞선 2011년 4월 5일, 워싱턴 스미소니언 히르숀미술관의 강연에서 이미 발표된 선언문으로, 아브라모비치는 갈라 무대에서 선언문의 취지를 '예술가들은 선언문을 거의 쓰지 않고, 이 시대에는 도덕적·슬롯적 행동의 규범이 필요하다' 직접 말했습니다. 미래주의와 다다 이래 아방가르드의 선언문 전통을 복권하겠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언은 어떤 자리에 놓여 있을까요? 봄에는 미술관 강연장에서 발표된 텍스트가, 가을에는 테이블 하나가 10만 달러에 팔리는 모금 행사로 자리를 옮겨, 선언문을 낭독하는 퍼포머들의 노동 위에서 공연하는 자리로 옮겨집니다. 재밌게도 이 선언문에는 "자신을 위해서든 미술 시장 앞에서든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선언의 내용과 선언이 놓인 자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밤이었던 거죠. 비숍이 중요하게 여기는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그것이 놓인 자리'라는 의미가 그 밤에 보이는 겁니다.


갈라 디너의 퍼포머들의 노동 조건은 이렇습니다. 퍼포머들은 오디션으로 뽑혔고, 테이블 아래 회전판에 앉아 3시간 동안 일어나거나 화장실에 갈 수 없었으며, 보수는 리허설 포함 150달러와 미술관 1년 멤버십이었습니다.

image.png이본 라이너


이 조건이 알려지자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는 비판하게 됩니다. 그는 1960년대 뉴욕 저드슨 메모리얼 교회에서 시작된 실험 무용 운동 — 저드슨 댄스 시어터 — 의 중심인물이었던 안무가입니다. 라이너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1965년에 쓴 한 단락이 말해줍니다. 「노 선언문 No Manifesto」이라고 불리게 된 텍스트인데, 모든 문장이 '반대한다(No to)'로 시작합니다.


스펙터클에 반대한다. 기교에 반대한다.
No to spectacle. No to virtuosity.

— 이본 라이너, 「노 선언문」 (Tulane Drama Review, vol. 10, no. 2, 1965)


무용에서 볼거리와 스타성을 빼고 걷고 구르는 일상의 움직임만 남기겠다는 선언이었고, 라이너는 평생 그 방향으로 작업해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논쟁은 선언문을 쓴 예술가가, 반세기 뒤에 열린 다른 예술가의 선언문의 밤을 겨눈 구도이기도 합니다. 라이너는 스펙터클에 반대한다고 선언했고, 아브라모비치의 선언문은 스펙터클 위에서 공연되고 있었으니까요.


라이너는 디치 관장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어요. 여기서 MoCA는 라이너를 리허설 참관에 초대하는 걸로 응수했는데, 라이너는 참관 후 오히려 서한을 다시 보냅니다. 더글러스 크림프, 벨 훅스 등 쉰 명이 공동 서명한 최종 서한의 논리는 흔한 착취 비판보다 한 칸 더 나아가 있습니다.


퍼포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해도, 그들은 착취당할 것이다.
[The performers are] willing… [but they] will be exploited nonetheless.

— 이본 라이너 외 50인, 디치 관장에게 보낸 공개서한 (2011.11.15)


자발성이 착취를 면제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본 라이너가 서한에서 꺼낸 파졸리니의 《살로》에는 반파시즘이라는 슬롯적 정당성이 있었지만, 이 "그로테스크한 스펙터클"에는 그런 정당성이 없다는 겁니다.


아브라모비치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행사 전 인터뷰에서 그는 두 가지로 응답합니다.


하나는 존중을 담은

"나는 이본을 정말 존경한다 I really respect Yvonne."


다른 하나는 반박하며,

"이 모든 비난들은, 실제로 그 상황을 겪어보기 전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All these accusations, you can't have them before you actually experience the situation."


그리고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밝힙니다. 이 퍼포먼스가 갈라라는 일상적인 상황에 "어떤 품위와 고요, 집중 some kind of dignity, serenity, and concentration"을 가져오기를 바란다고. 변론의 뼈대는 분명합니다. 퍼포머들은 오디션을 거쳐 스스로 선택했고, 언제든 나갈 수 있으며, 이것은 굴욕이 아니라 품위의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이너의 서한은 이미 그 변론을 겨냥하고 있었죠. 자발적이라 해도 착취당할 것이라는 문장은, 자발성을 방패로 삼는 논리를 미리 부러뜨려 놓은 거니까요.


재밌게도 2010년, MoMA에서 아브라모비치의 《The Artist Is Present》를 재연했던 퍼포머 3인이 공개서한을 냅니다. 이들은 라이너 편도 아브라모비치 편도 아닙니다. 두 사람 다 존경한다고 쓰면서, 논쟁의 초점을 노동으로 옮깁니다. MoMA 때 미술관의 첫 제안은 2시간 반 교대에 50달러, 준비 시간 보상도 산재 보상도 없었다고. 협상 끝에야 임시직 신분과 산재 보상을 얻었다고, 그리고 이렇게 요구합니다.


그 예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퍼포머들은 온당한 조건에서 일하고, 공정하게 보수를 받아야 한다.
…the performing artists who are making that possible must work in decent conditions and be fairly paid.

— 《The Artist Is Present》 재연 퍼포머 3인의 공개서한 (2011)


이제 이 밤을 둘러싼 말들을 나란히 놓아 보면, 모두 같은 갈라를 두고 말하지만 묻는 질문이 서로 다릅니다. 라이너의 질문은 이일을 해도 되는가? 보수가 얼마인가?라는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은 세 시간 동안 테이블 장식으로 세워두는 설정 자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잘못됐 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발적이라 해도 착취당할 것이라는 문장이 나온 겁니다. 옳고 그름을 묻는, 윤리의 질문입니다.


비숍은 『인공지옥』에서 이 갈라를 다루며, 퍼포머들이 테이블 장식 이상이 되지 못했다고 적었습니다. 해도 되는 일이었는지가 아니라, 하고 나서 무엇이 만들어졌는지를 본 거죠. 아브라모비치는 품위와 고요와 집중을 의도했다고 말했지만, 비숍이 본 결과는 장식이었습니다. 의도가 아니라 만들어진 의미로 작품을 판단하며, 앞에서 본 비숍의 기준이 여기서도 작동합니다. 좋은가 나쁜가를 묻는, 미학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퍼포머들의 질문은 아예 다른 차원의 질문을 합니다. 재연 퍼포머 3인의 서한은 갈라를 하지 말라고도, 작품이 나쁘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퍼포머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온당한 조건과 공정한 보수로 하라는 것 그리고 임금과 산재보상이라는 노동의 질문을 던집니다.


윤리의 기준인지, 미학적 기준인지, 비숍이 바카라 내내 붙들고 싸워온 이 문제가 이 하룻밤 위에서는 이본 라이너의 비판과 비숍의 비판이라는 두 사람의 인물로 나뉘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두 질문이 다투는 동안, 정작 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요구는 어느 쪽의 논점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기획과 실행에 있어서 완벽하게 의도대로 흘러가는 건 꿈만 같은 일이긴 합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보여준다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제3자나 참여자들에게는 다양하게 열려있는 건 맞으니까요. 그래서 의도가 아니라 만들어진 의미로 판단한다는 비숍의 기준이 제겐 가혹하지 않아요.


다만 2011년 갈라 디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의미에 대한 해석은 열려있어도 그 자리의 퍼포머들의 임금과 안전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윤리-미학-노동 이 세 가지 키워드가 하룻밤 사이에 동시에 논의되는 이벤트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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