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가
1969년, 미국의 도시계획 저널에 도표 하나가 실립니다. 「시민 참여의 사다리 A Ladder of Citizen Participation」로 행정 의사결정에서 시민이 갖는 권한의 정도를 여덟 단계로 나눈 도표입니다. 맨 아래 두 단계는 참여가 아니라 '조작, 치료. 시민을 바꿔야 할 대상'으로 보는 단계입니다. 그 위 세 단은 명목뿐인 참여로 정보 제공, 상담, 회유. 의견은 듣지만 결정권은 주지 않는 단계이며, 가장 위의 세 단계에서 비로소 권력으로 넘어가 파트너십, 위임된 권력, 그리고 최종 목표인 시민 통제를 다룹니다. 셰리 아른스타인(Sherry Arnstein), 행정학과 도시계획에서 반세기 넘게 인용되는 고전이지요.
이 사다리가 왜 전시 이야기에 나올까요? 아른스타인의 사다리는 참여형 예술을 평가할 때 거의 반사적으로 소환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참여형 예술에 있어서 관객이 더 많이 개입할수록, 더 많은 결정권을 가질수록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표가 달립니다. 비숍 또한 일부 인정합니다. 작품의 가치와 참여의 정도를 등치 시키고 싶은 건 포기하기 어려운 유혹이죠. 지난 글에서 우리는 2011년 LA의 갈라 디너 하룻밤을 놓고 윤리, 미학, 노동이라는 세 질문이 갈라지는 것을 정리했어요. 그리고 예술 작품이 좋은지 나쁜지는 결국 무엇으로 판단하는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비숍은 『인공지옥』의 결론에서 답하는데, 첫 번째 답이 바로 이 사다리를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사다리는 시민 참여의 여러 형태를 유용하면서도 섬세하게 구분해 보여주지만, 예술적 제스처의 복잡성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가장 도전적인 예술 작품들은 이 도식을 따르지 않는다. 예술에서의 민주주의 모델과 슬롯에서의 민주주의 모델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But while the ladder provides us with helpful and nuanced differences between forms of civic participation, it falls short of corresponding to the complexity of artistic gestures. The most challenging works of art do not follow this schema, because models of democracy in art do not have an intrinsic relationship to models of democracy in society.
— 클레어 비숍, 『인공지옥』 결론
아른스타인의 사다리는 권한이 시민에게 많이 넘어갈수록 좋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행정적인 의사결정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그와 다르게 참가형 예술에서 작가는 참가자가 상황을 창조적으로 써먹기를 기대하고, 참가자는 작가의 신호와 연출을 필요로 합니다. 비숍은 이 관계를 점점 더 고결해지는 정치 형식의 사다리가 아니라, 상호 긴장과 인정과 의존이 계속되는 줄다리기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참여의 양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는 이 긴장을 말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비숍이 이에 대해서 한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2000년, 빈. 독일의 영화감독이자 예술가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Christoph Schlingensief)는 빈 축제 주간의 커미션을 받고, 당시 오스트리아를 뒤흔든 사건에 정면으로 응답하기로 합니다. 외르크 하이더의 극우 정당 FPÖ가 선거에서 약진한 직후, 나치가 쓰던 단어까지 동원해 "외국인에게 잠식된 나라"를 외치던 선거였습니다. 슐링엔지프는 오페라하우스 앞에 선적 컨테이너를 세우고, 그 위에 현수막을 겁니다. 외국인은 나가라(Ausländer Raus). 컨테이너 안에는 시 외곽 수용소에서 데려온 망명 신청자들이 리얼리티 쇼 《빅 브라더》식 합숙 설비에서 생활했고, 그 모습은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됐습니다. 시청자들은 매일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투표했고, 저녁 8시마다 표를 가장 많이 받은 두 명이 추방 수용소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최후의 1인에게는 상금과, 지원자가 나타난다면 결혼을 통한 오스트리아 시민권이 주어진다고 공표됐습니다.
《오스트리아를 사랑해 주세요 Please Love Austria》 엿새 동안 광장은 뒤집혔습니다. 훈장을 단 우파 노인은 자기 생각과 같다며 반겼고, 좌파 학생들은 컨테이너를 부수고 망명자들을 "해방"하려 했고, 노벨상 수상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는 망명자들과 인형극을 만들었습니다. 한 노부인은 분을 못 이겨 슐링엔지프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이렇게 외쳤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예술가야!(You... artist!)"
https://www.youtube.com/watch?v=ADMajfCW3Q8
이 작품에 자주 따라붙은 비판이 있습니다. 누구의 생각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죠. 우파 노인은 여전히 우파고, 좌파 시위대는 여전히 좌파라는 겁니다. 비숍은 이 비판이 과녁을 잘못 잡았다고 답합니다. '전향(conversion)'은 예술의 목적이 아니고, 그 잣대는 작품을 선전물의 문제로 축소한다는 겁니다.
《오스트리아를 사랑해 주세요》의 불편한 교훈은, 구금을 예술로 재현한 것이 실제 구금 기관보다 디센서스를 끌어모으는 힘이 더 세다는 사실이다.
The disturbing lesson of Please Love Austria is that an artistic representation of detention has more power to attract dissensus than an actual institution of detention.
— 『인공지옥』 결론
'디센서스(dissensus)'는 철학자 랑시에르의 용어로, 합의의 반대말로, '당연하게 보이던 것에 이의가 제기되고 논쟁이 터져 나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빈 외곽 몇 킬로미터 바깥에는 진짜 추방 수용소가 있었고, 아무도 그 앞에서 싸우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페라하우스 앞의 가짜 수용소 앞에서는 광장과 신문과 방송을 엿새 내내 논쟁으로 채웠습니다.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지나치던 것을, 예술의 재현 앞에서는 지나치지 못한 겁니다.
아른스타인의 사다리를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의 참가자들은 결정권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가발과 선글라스로 가려졌고, 광장의 시민들은 구멍으로만 그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생산된 의미로 재면, 이 작품은 한 나라의 정치 담론이 품은 모순을 광장 한복판에 꺼내 놓았습니다. 비숍이 결론의 첫 섹션 제목을'사다리와 컨테이너(The Ladder and the Container)'라고 붙인 것이 이런 대비를 보여주기 위함이겠죠.
그래서 비숍의 답은 공식이 아니라 경고로 끝납니다.
참여예술은 특권적 정치 매체도, 스펙터클의 슬롯에 대한 기성품 해법도 아니다. 민주주의 자체만큼이나 불확실하고 위태롭다. 참여예술과 민주주의는 어느 쪽도 미리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맥락마다 거듭 실천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Participatory art is not a privileged political medium, nor a ready-made solution to a society of the spectacle, but is as uncertain and precarious as democracy itself; neither are legitimated in advance but need continually to be performed and tested in every specific context.
— 『인공지옥』 결론 (바카라의 마지막 문장)
참여라는 형식 자체에는 미리 주어진 가치가 없고, 매번 그 자리에서 시험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전에 프라하와 파리를 오가며 봤던 '같은 참여가 맥락에 따라 정반대의 것이 된다'라는 말이 바카라의 결론부에서 판단의 원칙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제 바카라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공공이든 상업이든, 참여를 내세우는 전시의 현장에서 '참여'라는 말은 가볍게 쓰입니다. 참여자 수, 관객 데이터, 포토존의 유무 — 저부터 그래 왔습니다. 제가 써온 결과보고서에서 참여를 증명하던 것은 늘 그 숫자들이었으니까요. 돌아보면 그것도 사다리였습니다. 참여의 양으로 전시의 가치를 재는, 아른스타인의 것보다 훨씬 엉성한 사다리요.
비숍은 사다리를 걷어찬 자리에 다른 공식을 놓지 않았습니다. 매번 그 자리에서 시험하라고만 했죠. 그러니 저에게 남는 숙제는 더 그럴듯한 지표를 찾는 일이 아니라, 다음 결과보고서의 숫자 옆에 문장을 하나 보태는 일입니다. 이 전시의 참여는 어떤 의미를 만들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