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가 통치가 될 때
1965년의 어느 밤, 런던 외곽 슬라우의 공업단지에서 바버라 스테베니(Barbara Steveni)라는 작가가 동료 작가들의 작업에 쓸 폐품을 공장 밖에서 줍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생각 하나가 스치는데, 공장 밖에 버려진 재료를 줍는 것보다, 작가가 저 공장 안에 들어가 일하는 쪽이 슬롯적으로 더 유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죠. 실로 합리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듬해 스테베니는 파트너인 작가 존 라담(John Latham)과 함께 조직한 APG( '예술가 파견 그룹(Artist Placement Group)')을 세웁니다.
존 라담은 누구일까요? 1966년, 그는 학생들과 함께 미술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평론가 그린버그의 바카라 『예술과 문화』를 씹었습니다. 말 그대로 입으로요. 도서관이 반납을 요구하자 씹은 바카라장을 담은 유리병을 돌려줬고, 학교에서 해고됐습니다. 재밌게도 그 유리병은 1970년 뉴욕현대미술관이 소장합니다. 이 사건으로 유명한 라담은 예술의 쓸모를 제도 바깥에서 묻던 사람이었어요. 근데, 이번에는 예술가를 제도 한복판에 들여보내는 조직을 만든 겁니다.
이 글을 따라 읽는 클레어 비숍의 『Artificial Hells, 인공지옥』에서 6장의 배경은 영국입니다. 지금까지 본 참여는 파리에서는 소비슬롯의 수동성에서 관객을 깨우려는 저항이었고, 프라하에서 국가의 집단주의로부터의 피난이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독재에 맞서는 무기였습니다. 영국에서의 참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APG의 작동방식은 스테베니가 기업과 공공기관에 편지를 보내 제안합니다. 기관에는 파견된 작가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하기보다, 그를 조직 안의 창조적인 외부인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APG는 이 '창조적인 외부인'을 '부수적 인물(Incidental Person)'이라 부릅니다. 이 부수적 인물은 조직의 목적에는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니지만, 곁에 있음으로써 무언가를 바꾸는 사람을 파견받으라는 것이죠. 파견 비용은 작가 한 명당 2,000~3,000파운드로 당시로서도 지금 생각해도 큰 금액이었고, 작품을 만들 계약상 의무는 없었습니다. 결과를 미리 정하지 않는 이 방식을 APG는 '열린 지시서(open brief)'라 불렀고, 슬로건은 이랬습니다.
"맥락이 작업의 절반이다(The context is half the work)."
1969년부터 파견이 시작됩니다. 비디오 작가는 항공사와 방송국으로, 조각가는 철강 회사로, 라담 자신은 국립석탄청으로. 퍼포먼스 작가 스튜어트 브리슬리(Stuart Brisley)는 가구 공장을 택했는데, 그것도 가장 고된 금속 연마실로 들어갔습니다. 경영진이 꽂아 넣은 작가를 노동자들이 의심하는 데서 시작해, 신뢰를 얻는 것이 작업의 대부분이었다고 그는 회고합니다. 그가 한 일은 노동자들이 고른 축구팀 색으로 연마 기계를 칠하고, 공장 바닥을 밀고 다닐 수 있는 대형 게시판을 들여서 노동자들끼리 소통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질문과 불만을 경영진에 전달하다가, 자신이 "공장과 경영진 사이의 영구적 갈등"에 끼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APG와 정치적으로 멀어지게 했습니다. APG가 노동자보다 경영진에 반해 있다고 봤거든요. 클레어 비숍도 APG가 힘을 실어주려 한 것은 조직 아래쪽의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가 자신을 위한 것라는 것을 짚습니다.
1971년 겨울, APG는 2년간의 성과를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Inno70》제목의 전시를 진행합니다. 헤이워드 역사상 최악의 관람객 수를 기록한 전시라는 악평이 남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외벽에는 "매물: 헤이워드 갤러리(FOR SALE Hayward Gallery)" 포스터가 붙었고,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조각(the Sculpture)'이라 이름 붙인 회의실이 설치돼 매일 기업·정부 관계자들과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대중은 그 회의에 참여할 수 없이, 투명 플라스틱 커튼으로 분리된 채, 참여를 말하는 조직의 회의를 구경만 할 수 있었죠.
이 전시의 대가는 컸습니다. 영국 예술위원회가 《Inno70》을 이유로 APG 지원을 끊은 겁니다. "순수한 예술보다 슬롯공학에 더 관심이 있다(more concerned with social engineering than with straight art)". '슬롯공학'은 슬롯를 기계처럼 설계하고 조정하려는 시도를 가리킵니다. 예술이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게 1972년 예술위원회의 논리였습니다.
같은 시기 영국에는 정반대 방향의 운동이 있었습니다. APG가 예술가를 의사결정의 중추인 기업 이슬롯와 정부 부처에 심었다면, 커뮤니티 아트 운동은 가장 소외된 곳으로 갔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전문 예술가들이 지역 주민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벽화를 그리고, 거리 연극을 만들고, 축제와 영상 집단을 꾸렸습니다. 이들은 국제 미술계의 위계와 퀄리티, 기량, 기료라는 평가 기준에 반대했습니다. 1974년, 커뮤니티 아트 운동에 대한 지원 신청이 쏟아지자 예술위원회는 위원회를 꾸려 이 새로운 경향을 정의합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과 공동체와 맺는 관계다. […] 그런 점에서 그들은 기성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과 다르다. 완성된 결과물보다 작업 과정에 더 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Their primary concern is their impact on a community and their relationship with it […] They therefore differ from practisers of the more established arts in that they are chiefly concerned with a process rather than a finished product.
— 영국 예술위원회 커뮤니티 아트 보고서(1974), 『인공지옥』 6장에서 재인용
비숍은 이 정의가 오늘날 슬롯참여예술의 통용 정의와 거의 같다고 지적합니다. 결과보다 과정, 성취보다 태도인 거죠. 그런데 이런 예술 형식은 무엇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커뮤니티 아트 진영은 스스로도 퀄리티에 대한 평가를 거부했으니까요.
비숍은 이 빈 평가 칸에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찾아갑니다. 1979년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집권하고, 공공지출을 줄이고 국가가 바카라임지던 복지를 축소하는 것을 기조로 삼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커뮤니티 아트가 바로 그 복지국가에 기대어 서 있던 운동이었다는 거죠. 커뮤니티아트의 초기 조직가들은 무급으로 일하며 실업 급여로 생계를 버텼고, 활동은 공공 지원금으로 굴러갔으니까요. 기댈 수 있던 공공 예산이 줄어드니 운동도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어요. 예술위원회는 커뮤니티 아트에 대한 통제를 점점 강화하다가, 1982년에는 직접 지원을 거의 전면 중단합니다.
여기서 비숍은 이것을 단지 정부 기조의 변화 탓으로만 돌리지 않습니다. 커뮤니티 아트 내부의 문제도 있었죠. 그들은 바카라임을 나누면 위계가 생긴다며 역할 분담 자체를 거부하고, 기량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여기던 작동 방식, 비평가 찰스 랜드리가 '자발적 무조직화(voluntary disorganisation)'라 부른 상태로 운영되었습니다. 마치 국내 소셜벤처들이 운영되는 방식과 비슷하네요. 그들 또한 소셜벤처로 인증받으면 운영지원금을 넉넉히 받았는데, 이전 정부 기조에 따라 삭감됐습니다. 어찌 되었든 커뮤니티아트는 1980년대 중반이 되면서 거의 전면적으로 무력해집니다. 커뮤니티 아트 운동의 내부 역사가인 오언 켈리(Owen Kelly)는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국가의 한 부처가 남긴 혼란을 국가의 다른 부처가 보낸 사람들이 치우게 하자고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국가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다.
We were, in effect, inviting people to let one branch of the state send in a group of people to clear up the mess left by another branch of the state, while at the same time denying that we were working for the state.
— 오언 켈리, 『공동체, 예술 그리고 국가』(1984), 『인공지옥』 6장에서 재인용
해방의 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보조금 의존이 됐고, 활동가였던 커뮤니티 아티스트들은 복지 인프라의 빈틈을 메우는 준(準) 공무원이 됐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술위원회 의장은 커뮤니티 아트의 의미를 비틀어 '문화 생산을 민주화하는 운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참여를 통해 오페라와 미술관의 가치를 알게 되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리브랜딩이 됩니다. 처음에 저항의 의미와 자유로운 성향의 예술 형식이었던, 위계를 허물겠다던 운동이 고급문화로 인도하는 통로로 재브랜딩된 겁니다.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는 참여형 예술작품이나 커뮤니티 아트를 표방하는 전시형태 또한 고급문화 체험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모로 영국의 모습과 한국의 모습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요.
비숍은 1974년 주요 보고서의 평가 기준의 모호함이 바로 예술위원회가 이 운동을 자기 목적대로, 슬롯복지 서비스(social provision)로 재개발할 도구가 됐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면, 소외 아동 얼굴에 그림 그려주기, 청소년들에게 커뮤니티센터 벽화 그리기 같은 형식으로요.
1972년 예술위원회는 슬롯공학을 한다는 이유로 APG를 끊었습니다. 오히려 비숍은 그에 대해 1997년부터 2010년까지 집권한 노동당 정부('뉴레이버')는 예술위원회를 명시적으로 슬롯공학에 복무하게 만들었다고, 문화를 슬롯 통합 정바카라의 수단으로 쓰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APG는 예술의 가치를 재겠다며, 고안했던 델타 단위(돈이 아니라 '주의(attention)의 단위'로 가치를 재산정하자던)는, 뉴레이버가 선호하게 될 문화 평가 방식을 선취한 것이 됐습니다. 예술적 퀄리티라는 어려운 논쟁 대신, 관객 인구통계와 방문자 수라는 통계로요. 참여를 제도 안으로 들여보낸 두 운동 모두, 자신들이 상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실현된 셈입니다.
비숍이 다룬 네 가지 사례를 살펴봤습니다. 파리에서 참여는 저항이었고, 프라하에서는 피난이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무기였고, 영국에서는 통치의 기술이 됐습니다. 같은 단어가 네 개의 체제에서 네 개의 전혀 다른 일을 했어요. 이렇듯 '참여'라는 형식 자체에는 아무런 고정된 정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비숍이 네 개의 장에 걸쳐 쌓아 올린 결론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1989년 이후의 동시대로 돌아가, 참여의 역사에서 가장 노골적인 형태를 살펴봅니다. 바로 작가가 참여자를 고용하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