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뒷방 ⑩ Delegated Performance

진정성의 아웃소싱

byWen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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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general view of the atmosphere at the 2011 MOCA Gala, An Artist's Life Manifesto(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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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LA MoCA)의 연례 갈라 디너가 있었습니다. 테이블마다 회전판 위에 사람의 머리가 하나씩 올라와 있는 진풍경이 있었죠. 85명의 퍼포머가 150달러와 MoCA 1년 멤버십을 받는 조건으로 테이블 아래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만 식탁 위로 내밀고 식사하는 손님들의 눈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주 부담스럽게도, 식사하는 손님들의 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갈라 디너에 온 손님들의 티켓값은 무려 2,500달러 이상을 지불하고 참가했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가 디렉팅한 '인간 테이블 장식'을 마냥 좋게 볼 순 없었습니다. 안무가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 1934– , 미국의 안무가이자 영화감독)는 공개서한을 통해 "착취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스펙터클"이며, 파졸리니의 《살로》가 떠오른다고 분노하며 비판합니다.


image.png파졸리니의 《살로》(1975) 포스터


비숍도 이 작업을 비판하지만, 이본 라이너와는 다른 포인트를 짚고 있습니다.

아브라모비치의 테이블 장식의 문제는, 그것이 테이블 장식 이상이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the problem with Abramovic's table decorations is that they don't become more than table decorations.

- 클레어 비숍, 『인공지옥』 8장 delegated performance


착취라고 비판하기보다 퍼포먼스의 진부함의 면에서 비판합니다. 더불어 미술관이 돈을 모으려고 이런 "미디어 스턴트(Media Stunt)"를 퍼포먼스 아트로 포장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죠. 이본 라이너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묻는데, 비숍은 작품이 무엇을 해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테이블 아래의 그 사람들은 작품의 참여자로서 존재할까요? 돈 받고 일하는 노동자로서 존재할까요?


인공지옥의 8장의 제목은 '위임된 퍼포먼스(delegated performance)'입니다. '위임(delegation)'은 원래 경영용어로 권한을 위임하고, 업무를 외주 주는 것인데, 비숍은 퍼포먼스라는 예술 용어 옆에 이 경영 용어가 붙여버립니다. 아브라모비치가 자기 몸으로 수행하던 일을 남의 몸에 맡기는 이 경향이, 기업들이 노동을 저임금 국가로 넘기던 아웃소싱의 시대와 나란히 가고 있다고 보는 관점인 거죠. 실제로 비숍은 이 장의 후반에서 기업의 '해외 아웃소싱(offshore outsourcing)'과 이 작업들을 나란히 놓고 읽습니다. 비숍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비전문가나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해서, 작가를 대신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며 수행하는 일을 맡기고, 작가의 지시를 따르게 하는 것.
…the act of hiring non-professionals or specialists in other fields to undertake the job of being present and performing at a particular time and a particular place on behalf of the artist, and following his/her instructions.

- 클레어 비숍, 『인공지옥』 8장 delegated performance


이 정의에는 갈라 디너에 대보면 절반정도는 맞습니다. 퍼포머 85명은 분명 '작가를 대신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도록' 고용됐으니까요. 비숍이 8장 위임된 퍼포먼스(delegated performance)에서 사례로 들고 있는 작가들(산티아고 시에라 등)은 배역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슬롯경제적 범주를 수행하도록 고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위임된 퍼포먼스에 대한 경향의 분기점으로 꼽는 작가를 보면 선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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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인 액션 Culture in Action》(1993)


이 작업들이 등장한 배경을 잠시 짚고 가면, 비숍의 7장에서 1989년 현실슬롯주의(actually existing socialism)가 무너진 이후(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과 동유럽의 슬롯주의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한 해)의 1990년대 초를 다루는데, 이 시기 예술은 완성된 전시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열린 '프로젝트'가 되어 갑니다. 여러 작가가 도시의 공동체와 몇 달씩 협업했던 시카고의 《컬처 인 액션 Culture in Action》(1993) 같은 기획들이 그 표지입니다. 위임된 퍼포먼스는 이 프로젝트의 시대 위에서 등장한, 사람을 쓰는 가장 노골적인 형식이었습니다.


1999년, 산티아고 시에라는 년 한 해 동안 작업이 단계적으로 변합니다. 7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유급 노동자들이 콘크리트 블록 24개를 하루 종일 옮기는데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고 그들의 존재와 지불 사실만 알려집니다. 8월 과테말라시티에서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골판지 상자 안에 숨겨집니다. 그리고 10월 멕시코시티에서 처음으로 참가자들이 눈앞에 보이고(《450명의 유급 인원》), 12월 아바나에서 지금까지도 논쟁적인 작업이 나옵니다.


image.png《여섯 명의 유급 인원에게 문신된 250cm의 선》,1999


《여섯 명의 유급 인원에게 문신된 250cm의 선》, 작품 설치 자체를 만들던 노동이 노동자 자신의 전시가 되기까지 6개월의 시간밖에 들지 않았어요. 시에라는 당연하게도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로 노동을 '아웃소싱'하는 지구화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할 뿐이라고요.


이에 대한 비숍의 생각은 달랐어요. 오히려 시에라의 작업은 경제 시스템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게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모집은 인력 사무소를 거치고, 금전 거래가 작가와 퍼포머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시에라는 지불 내역을 작품 설명의 일부로 명시합니다. 경제적 맥락 자체가 그의 일차 재료라는 겁니다. 지난번에 본 취리히의 그 작업 — 보를 지고 선 사람들의 시급 20 스위스프랑이 작품 기록에 박혀 있던 것 — 이 이제 설명됩니다. 그 숫자는 부끄러워서 숨길 정보가 아니라, 작품이 보여주려는 것 그 자체였던 겁니다.


image.png《벽에 수평으로 지탱되도록 제작된 600×57×52cm의 오브제》(2001)


앞서 언급한 '자기의 슬롯경제적 범주를 수행하도록 고용한다는 것'도 시에라에게서 풀립니다. 사실 연극이나 영화도 사람을 고용해 연기시키지 않느냐고 할 수 있죠.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심지어 배우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죠. 예를 들면 배우 송강호를 캐스팅하는 건 연기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송강호이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그때의 '누구'는 배우로서 쌓아온 이름이고, 그 이름으로 그가 하는 일은 여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에라의 고용은 정반대의 사례로, 고용된 사람은 아무도 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거기 있을 뿐이며, 중요한 '누구'는 이름이 아니라 존재 자체입니다. 더불어 취리히의 그 사람들은 유명해서가 아니라 실제 정치 난민이어서 고용됐고, 작품 제목에는 이름 대신 숫자 —《450명의 유급 인원》, 《여섯 명의 유급 인원》— 로만 남게 됩니다. 즉, 범주만 맞으면 누구로든 바꿀 수 있다는 것, 그 대체 가능성이야말로 이 작업들이 드러내는 노동의 조건인 것이죠. 연기가 아니라 존재가, 이름이 아니라 처지 그 자체로 아웃소싱되는 겁니다.


비숍은 위임된 퍼포먼스를 세 유형으로 나눕니다. 1) 비전문가들이 자기 정체성의 한 측면을 수행하는 작업 — 시에라가 여기 속합니다 — 과, 2) 다른 분야의 전문가나 종사자를 고용해 수행하게 하는 작업, 그리고 3) 비디오와 필름을 위해 구성된 상황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가장 유명한 작가로 비숍이 꼽는 사람이 최근에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진행한 티노 세갈(Tino Sehgal)입니다. 시에라와 나란히 놓으면 대비가 선명한데, 시에라는 지불 내역까지 작품 설명에 박아 모든 것을 드러내는 작가라면, 세갈은 작품의 사진 기록조차 남기지 않는 작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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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와 경제학을 공부한 세갈은 용어부터 자기 식으로 바꾸는데, 자기 작업은 '퍼포먼스 아트'가 아니라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이고, 고용된 사람들은 퍼포머가 아니라 '해석자(interpreter)'라고 불러달라는 겁니다. 연주자가 악보를 해석하듯, 작가가 짜둔 상황을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해 수행한다는 뜻이에요.


비숍은 티노 세갈의《이 객체의 저 목적 This Objective of That Object》을 사례로 들며 말하고 있어요. 해당 작품은 관객이 전시장에 들어설 때 다섯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서서 말을 겁니다. 주체성과 객체성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라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작품 참여자들은 주로 철학과 학생들인데, 대사가 반쯤 정해져 있어서 토론은 어딘가 기계적으로 흘러가고, 관객이 무슨 말을 보태든 작품의 구조는 바뀌지 않습니다. 정해진 상황 안에서 자기 역할을 맡게 될 뿐이죠. 관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다섯 사람은 새 관객이 들어올 때까지 바닥으로 시들 듯 가라앉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d7rmCBFbn0

*티노 세갈의 작품을 찾긴 어려워서 유튜브에 짧은 영상으로 대체합니다.


여기서 비숍이 짚는 역설이 재미있습니다. 퍼포먼스에는 오래된 믿음,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만 벌어지는 라이브이기 때문에, 반복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사건이기 때문에 진짜라는 믿음으로 '라이브가 곧 진정성'이라는 등식입니다. 여기서 티노 세갈은 사진까지 금지하고 있고, 이러한 믿음의 수호자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비숍이 보기에 그의 작업이 실제로 하는 일은 정반대입니다.


세갈의 작품은 전시 기간 내내, 교대 근무하는 여러 해석자에 의해 하루 종일 반복됩니다. 어제의 해석자와 오늘의 해석자가 같은 상황을 다르게 수행할 뿐, 단 한 번의 '원본' 같은 건 애초에 없습니다. 라이브는 맞는데, 유일한 순간은 아닌 겁니다. 라이브와 진정성의 등식이 여기서 풀립니다.


8장의 위임된 퍼포먼스에서 비숍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임된 퍼포먼스'를 착취의 축소판으로 기각하는 손쉬운 비판은 이 작업들이 다루는 시스템에 대한 지적, 즉 아웃소싱 시대의 노동이 어떤 윤리와 미학 위에 서 있는지를 놓친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례들은 수행자와 관객 모두에게 더 복잡하고 불편한 경험을 만들며, 바로 그 불편함이 물화(reification, 사람과 관계가 사물처럼 취급되는 것)라는 한 단어로 끝나지 않는 질문을 열게 된다고 합니다.


이번 글이 조금 길었는데, 처음의 갈라 디너로 돌아가면 아직 못 다룬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날 밤에는 이라는 선언문이 낭독「An Artist's Life Manifesto(예술가의 삶 선언)」됐고, 저명한 안무가가 이끄는 50명의 항의 서한이 날아들었고, 테이블 아래 있던 퍼포머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도 입을 열었거든요. 다음 글에서는 그 하룻밤을 통째로 해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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