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뒷방 ⑧ Social Sadism

'참여'가 무기가 될 때

byWenza
image.pngGraciela Carnevale, Artist Acción del encierro (Lock-up action) , 1968


1968년 10월 7일, 아르헨티나의 도시 로사리오에서 한 전시가 시작됩니다. 전시장의 관객들은 텅 빈 공간에 들어서게 되는데, 벽은 비어있고, 유리로 된 한쪽 벽은 가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들어오자, 작가 그라시엘라 카르네발레(Graciela Carnevale)는 문을 잠급니다.


이 방에서 참여하는 관객은 […] 갇혀 있다. 나는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다. 요점은 사람들이 들어오게 하되,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탈출할 가능성은 없다. 사실 관객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관객은 폭력적으로 참여를 강요당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객의 반응은 언제나 참여의 한 형태다.
In this room the participating audience […] has been locked in. I have taken prisoners. The point is to allow people to enter and to prevent them from leaving […] There is no possibility of escape, in fact the spectators have no choice; they are obliged, violently, to participate. Their positive or negative reaction is always a form of participation.

— 그라시엘라 카르네발레, 1968년 액션에 대한 작가 진술 (『인공지옥』 4장에서 재인용)


한 시간 뒤, 갇힌 사람들은 창문을 가린 포스터를 뜯어냈습니다. 장난이라는 웃음은 차츰 짜증으로 바뀌었지만, 작가의 기대와 달리 안에 있던 누구도 행동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리를 깬 것은 거리에 있던 행인이었습니다. 관객들은 깨진 유리 구멍으로 빠져나왔고, 그중 몇몇은 작품을 망쳤다며 우산으로 그 구조자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출동한 경찰은 이 행사를 체 게바라 체포 1주기와 연결 지어 폐쇄했습니다.


지난 글에서 본 1960년대 파리의 참여는 소비슬롯의 수동성에서 관객을 깨우려는 저항이었습니다. 선물을 나눠주고, 관객을 참여하게 만들고 싶다는 의도를 갖고 있는 축제와 해방의 언어였습니다. 같은 시대 아르헨티나의 참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다.


클레어 비숍은 『인공지옥』은 4장 ⟪Social Sadism⟫을 여기에 씁니다. 1966년 6월, 온가니아 장군의 쿠데타가 민선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헌법을 정지시켰습니다. 이후 장군들이 번갈아 집권하는 군사독재가 이어졌고, 검열이 일상이 된 나라에서, 참여는 즐거운 체험이 아니라 훨씬 날카로운 도구가 됩니다.


image.png오스카르 마소타(Oscar Masotta)


출발점은 뜻밖에도 학문의 장이었어요. 작가이자 지식인 오스카르 마소타(Oscar Masotta)는 196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거의 매일 모이는 독서 모임을 이끌었는데, 바르트, 매클루언, 레비스트로스 같은 유럽 이론을 읽고 그것을 작품과 삶에 적용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안티해프닝(Anti-Happening)'입니다. 1966년 7월, 이 그룹의 작가들은 해프닝을 연다는 보도자료와 떠들썩한 파티처럼 보이는 연출된 사진을 언론에 뿌렸고, 신문과 잡지에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해프닝은 애초에 열린 적이 없습니다. 《죽은 멧돼지를 위한 해프닝 Happening para un jabalí difunto》이라 불리게 된 이 작업은 오직 언론 보도로만 존재했고, 두 번째 보도자료로 그 사실을 폭로해 미디어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드러냈습니다. 파리의 해프닝이 지금 여기의 경험을 예찬했다면, 이들은 그 예찬이 신화임을 보여주는 쪽을 택한 겁니다. 현장에 있던 사람과 기사로 읽은 사람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니까요. 요즘 현장의 정보와 맥락적 요소를 신문기사나 스레드와 같은 SNS로 확장시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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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 inducir al espíritu de la imagen(좌측 1966/우측도라 가르시아의 2016 재현)


1966년 11월, 마소타는 직접 해프닝인 《이미지의 정신을 불러내기 위하여 Para inducir al espíritu de la imagen》를 연출합니다. 노인 스무 명이 돈을 받고 창고 공간의 흰 벽 앞에 서서, 귀를 찢는 전자음과 눈이 머는 백색광 속에서 한 시간 동안 관객의 시선에 노출됐습니다. 마소타는 시작 하며 관객에게 이 행사의 경제 구조를 상기시킵니다. 당신들은 이 광경을 보려고 200페소를 냈고, 저 사람들은 600페소를 받고 서 있다고요. 사전에 논의한 것 중에 참여자들이 떠나고 싶을 때 신호할 깃발을 주려던 계획이 있었는데, 그 계획은 철회했습니다. 상황이 물러진다는 이유였습니다.


흰 벽을 배경으로, 백색광에 영혼이 모욕당하고 납작하게 짓눌린 채, 노인들은 한 줄로 나란히 뻣뻣하게 서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남들의 시선에 자신들을 내맡길 태세였다. […] 나는 관객 쪽을 바라보았다. 관객 역시 미동도 없이 노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Against the white wall, their spirit shamed and flattened out by the white light, next to each other in a line, the old people were rigid, ready to let themselves be looked at for an hour. […] I looked toward the audience: they too, in stillness, looked at the old people.

— 오스카르 마소타, 「나는 해프닝을 저질렀다 I Committed a Happening」(1967), 『인공지옥』 4장에서 재인용


진보진영의 지인들이 묻자 마소타는 '명시화된 슬롯적 사디즘의 행위(un acto de sadismo social explicitado)', 즉 슬롯가 날마다 암묵적으로 저지르는 가학을, 숨기지 않고 무대에 올렸다고 답합니다.


image.pngLa Familia Obrera (The Working Class Family) 1968


196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위예술 중심지였던 디텔라 연구소(Instituto Torcuato Di Tella)의 전시에서, 오스카 보니(Oscar Bony)는 신문 구인 광고로 모집한 실제 노동자 가족을 평소 임금의 두 배를 주고 하루 여덟 시간씩 좌대 위에 앉혔습니다. 《노동자 가족 La Familia Obrera》이라는 작품은 잘 차려입은 중산층 관객들이 좌대 위의 가족을 구경했고,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이 "돈을 받고 자신을 보여주는 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공유된 굴욕"을 관객에게 부과한다고 썼습니다. 재밌게도 오스카 보니는 스스로를 '고문자'라 불렀습니다. 그만큼 이 작품은 정치보다 도덕적 불편이 주는 생산에 기반한 작업이었다는 거겠죠. 참가 예술의 일부로서 돈을 받고 전시되는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그저 노동자와 관람자로 나누면 편할 것을 불편한 관계를 드러내고 있죠. 여기까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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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 título (conocida también como Las sillas o La vidriera), Ciclo de Arte Experimental, 1968


같은 시기에 로사리오에서도 흥미로운 작품이 공개됐는데, 1968년 5월~10월, 전위예술가그룹(Grupo de Artistas de Vanguardia)은 보름마다 하나씩 '실험예술 연쇄(Ciclo de Arte Experimental)'라는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전시장을 의자로 채우고 전부 쇼윈도 쪽으로 돌려놓아 관객이 거리를 구경하는 동시에 행인의 구경거리가 되게 한 연출, 전시장을 버려진 듯 닫아 두고 작품은 시내 반대편 바카라방에 있다는 공지만 붙여, 관객이 작품을 추적하게 만든 연출, 전시장 앞 거리에서 두 작가가 싸움을 연출해 행인들이 뜯어말리게 만든 다음, 이것이 작품이었다는 전단을 공중에 뿌린 액션 그리고 이 연쇄의 마지막 순서로 예정돼 있던 것이, 이 글의 첫 사례였던 카르네발레가 오프닝 관객을 가둬버린 그 전시장처럼 경찰이 그 액션과 함께 연쇄 전체를 폐쇄하면서, 잠긴 문은 이 실험예술 연쇄의 마지막 작품이 됐습니다.


이듬해 이 작가들은 슬롯학자, 기자들과 함께 마지막 기획으로 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uabHkwdBVg

《투쿠만은 불탄다 Tucumán Arde》(1968)


참여형 예술 작품의 선구자적인 작품인《투쿠만은 불탄다 Tucumán Arde》(1968)는 북부 투쿠만 주의 설탕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전시였습니다. 입구 바닥에는 제당소 소유주들의 이름과 권력층과의 연결망을 적은 현수막이 깔렸고, 벽은 투쿠만 관련 신문 기사의 콜라주로 덮였고, 중앙 홀에는 통계 현수막과 주민들의 확대 사진, 녹음 인터뷰가 스피커로 흘렀습니다. 2분마다 건물 전체가 정전되었는데, 그 간격으로 투쿠만의 아이가 한 명씩 죽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개막일에는 설탕 없는 커피가 제공됐고요. 이 전시는 이후 정치적 전시 기획의 고전이 됐습니다. 그런데 비숍은 여기서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 정작 참여라는 예술 전략은 희생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관객은 그저 보고 다시 읽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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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온도를 보여주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1968년 8월 로사리오의 전위예술 전국대회에서 작가 레온 페라리(León Ferrari)가 한 말입니다.


예술은 아름다움도 새로움도 아닐 것이다. 예술은 효과를 내고 교란을 일으킬 것이다. 제 역할을 다한 예술 작품이란, 작가가 처한 환경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나라에서 테러 행위가 일으키는 것과 비슷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Art will be neither beauty nor novelty; art will be efficacy and disturbance. An accomplished work of art will be that which, in the artist's environment, can make an impact similar to the one caused by a terrorist act in a country struggling for its freedom.

— 레온 페라리, 전위예술 전국대회 발표(1968), 『인공지옥』 4장에서 재인용


이 전시의 시작과 다르게도 교란을 선언한 예술이 보여진 곳에서는 결국 메시지를 가르치는 전시였습니다. 비숍은 점점 조여 오는 독재 앞에서 가르치려는 정치 예술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연출가 아우구스투 보알(Augusto Boal, 1931-2009)은 브라질의 군사정권을 피해 1971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거기서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1974)을 썼습니다(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학』에서 제목을 가져온 바카라). 보알의 핵심 주장은 관객이라는 자리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었는데, 모두가 관객이면서 엑터인 '관객-배우(spect-actor)'가 되어야 하고, 연극은 '혁명의 리허설(rehearsal of revolution)'이어야 한다는 거죠.

image.png아우구스투 보알(Augusto Boal, 1931-2009)

그래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이지 않는 연극(Invisible Theatre)'을 고안합니다. 당시에는 경찰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홍보나 사전 예고나 무대도 없이 해야 했죠.


관객들은 쇼를 인지하지 못하고, 쇼를 보게 될 것이다.
Spectators would see the show, without seeing it as a show.

— 아우구스투 보알,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1974), 『인공지옥』 4장에서 재인용


보알이 바카라에서 전하는 사례는 이렇습니다. 점심시간의 붐비는 식당, 배우 몇 명이 손님들 사이에 흩어져 앉아 있고, 주인공 역의 배우가 큰 소리로 비싼 단품 요리를 주문해 먹고는, 계산서 앞에서 갑자기 '돈이 없으니 노동으로 지불하겠다고 선언하고 제안합니다. 요즘 같으면 큰일 날 사건이죠.


"쓰레기를 내다 버리면 얼마를 받습니까?"


웨이터가 대답을 피하자 다른 테이블의 배우가 끼어듭니다.


"쓰레기 수거 일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시급이 7솔이라고요."


그러니까 10분짜리 식사를 갚으려면 열 시간을 일해야 한다는 계산이, 손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지게 됩니다. 리얼타임 연극에서 웨이터 역은 진짜 웨이터가, 지배인 역은 진짜 지배인이 자기도 모르는 채 연기했고, 식당은 임금과 노동에 대한 공론장이 됐습니다. 보알의 표현으로는 "우리가 써둔 대본과 거의 글자 그대로" 말했고 웨이터와 지배인이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비숍은 앞서 본 실험예술 연쇄와의 차이를 이렇게 짚습니다. 전시장을 잠그고 거리 싸움을 연출했던 로사리오의 전위예술가그룹이 미술 관객을 상대로 억압의 은유를 만들었다면, 보알은 자신이 관객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계급과 임금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토론하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리고 이 연극이 보이지 않아야 했던 것은 미학의 선택이기 전에 정치의 필요였다고 합니다. 그 시점의 아르헨티나의 독재는 그만큼 폭력적이었으니까요.


1960년대의 유럽과 북미의 참가예술이 소비슬롯의 스펙터클을 비판하며 직접 경험과 집단 활동을 예찬했다면, 아르헨티나의 작가들은 그 예찬 자체를 의심했고, 그 의심을 독재에 대한 저항과 결합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사람을 재료로 쓰는 강제적 상황들은 더 큰 잔혹(독재) 앞에서 의식을 깨우는 무기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례들은 참여가 곧 민주주의라는 오늘의 등식에 일찌감치 물음표를 달아 둔 선례로 확인됩니다. 1970년대에 독재가 더 깊어지면서 이런 실험은 강제로 중단됐고, 많은 작가들이 망명하거나 다른 일을 찾았습니다.


프라하에서는 참여는 국가의 집단주의로부터의 피난이었고, 파리에서의 참여는 해방의 축제였고,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로사리오에서는 강제와 교란의 무기였습니다. '참여'라는 단어가 체제마다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바로 다음 글은 클레어 비숍의 나라인 영국에 대해서 참여가 통치도구로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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