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퇴사! 그런데 ‘왜 아직 못 쉬지?’

/ 퇴사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by홍나씨


2025년 4월 4일, 조금 긴 겨울이 끝나가던 역사적인 날. 공교롭게도 나의 겨울도 끝나는 날이었다. 전날까지 인수인계를 포함해 이런저런 업무를 정리하고, 정들었던 팀원들에게 보내는 카드를 쓰고 나니 밤 11시에나 긴 하루를 끝낼 수 있었다.


인사는커녕 마지막까지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가까운 동료분들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환대와 선물을 한 아름 받았다. 선물과 짐을 넣은 큰 박스와 어딘가 허전한 마음을 동시에 안고서, 몇 달 만에 후련한 발걸음으로 조금 이른 퇴근을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들을 한가득 받은 탓인지 그 따뜻한 마음에 눈물 살짝 머금은 채.


바로 집에 가기가 아쉬워 강남역 대로변에 위치한 카페에 들러 잠시 짐과 마음을 함께 정돈했다. 어쩌다 보니 역사적인 날과 겹친 탓도 있었겠지만 금요일 오후의 설렘과 인파로 가득한 강남역에서 약간 나만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이제 새로운 시작이니까!


그렇게 분명 엄청난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사날을 보내고 일부러 사람이 거의 없는 제주도 종달리로 홀로 여행까지 다녀왔는데, 기분이 내내 이상했다.


정확히는 후련해야 할 마음이, 늘 퇴사할 때마다 새로운 시작에 들떠있던 마음이 움직이지가 않았다.


다정하고 귀한 마음들





퇴사 직후도 아닌 바로 다음날, 이 년 가까운 시간 고생한 만큼 4월 한 달만큼은 쉬면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채울 생각이었다. 모처럼 푹 자고 일어난 주말 아침, 모처럼 천천히 아침을 즐기기 위해 원두 향을 음미하며 드립커피를 내리던 중, 훅 들어오는 엄마님의 어퍼컷에 손이 잠깐 멈췄다.


벌써부터 늘어지면 안 되지, 나이도 있는데 -


지금이라면 ‘나 어제 퇴사했어^^...’ 하며 넘겼을 텐데, 그땐 웃으며 받아쳐질 정도의 여유조차 없었나 보다. 안 그래도 ‘쉬면 안 된다’라는 강박이 천장부터 누르는 느낌에 쐐기를 박아준 느낌이었달까?




퇴사 전후로 업무 외에도 GPT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정말 많이 던졌었는데, 이 즈음에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들은 ‘늦었다’ ‘쉬어도 되나’ ‘초조’ ‘불안’을 키워드로 한 것들이었다.


전 회사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가장 오래 다닌 조직이었고, 오랜만에 ‘내 자리’가 생겼던 공간이었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던 일상에서 나만 사라진다는 것이 마치 그 옛날 전학이나 졸업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허전한 느낌이었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로 가득 채웠던 바카라상에서 온갖 물건들을 빼고 휑해진 바카라상을 보니 싱숭생숭해지기도 했다.


일 년도 훨씬 지나 돌이켜보면 첫 퇴사도 첫 이직도 아니었기에, ‘바로 시작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쉬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공허함이 뒤섞여 오묘한 상실감으로 나타난 게 아니었을까? 함성으로 가득한 콘서트 후 철거되는 무대를 보는 것처럼 이상하게 공허하고 허전했다. 콘서트 같은 화려함도 없었고, 예전처럼 매일 야근해도 끝나지 않을 업무량에 깔릴 만큼도 아니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찾은 내 자리에 매일 같은 사람들이 반겨주었던 것이 공기처럼 너무 익숙하게 스며들었던 걸까?


아침에 일어나 당연하게 갈 곳이 없다는 것이, 반겨주는 사람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이 희한할 만큼 헛헛했다.



누가 봐도 지쳐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생전 처음 과호흡까지 왔던 상황에서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제대로 쉬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 제대로 쉬지 못한 걸 바카라망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일단 날이 좋다는 핑계로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벚꽃으로 물들었어야 할 집 앞 골목길에는 4월 중순이 되도록 아직도 봄이 오질 않았다. 그 와중에 채 피지도 않은 꽃들 사이로 벌써 땅에 흩뿌려진 꽃잎들도 꽤 보였다.


내게도 봄이 아직 오지 않은 걸까?


자유의 몸이 되면 ‘고민 끝! 홀가분!’ 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나 막막하고 불안하면서도 공허한 감정은 참으로 오랜만이라 혼란스러웠다. 이제 어떤 감정이 됐든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으리라 다짐했거늘, 회오리치는 꽃바람처럼 붕 뜬 느낌에 어디에든 발을 딛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쉬기 위해 ‘백수의 특권!’이라며 꾸역꾸역 서촌으로 향했다. 비슷한 시기에 퇴사한 친구를 만나 각자의 지난 시간들을 한참 털어놓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서촌에서 맞이하는 벚꽃은 처음이었는데, 밤까지 흐드러지게 핀 벚꽃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기분 좋은 봄바람이 산을 타고 불어오더라.

손끝에 살짝 스치는 봄바람과 벚꽃 나무를 온몸으로 흠뻑 맞아보고 싶었다.


후……


하며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숨을 쉴 수 있었다.



이번 봄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진짜 쉬고 싶어.




월, 목 연재
이전 03화뱉어내고 싶었던 말들 또는 토해내고 싶었던 감정들